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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막 : 이 한 별

 

무술은 모든 형태의 미디어에
침투해 있습니다

 

마치 열병 같아요

 

사방으로 퍼지는 바이러스 같죠

 

우린 잘 몰라도
곳곳에 존재해요

 

무술은 광고나
드라마뿐만 아니라

 

뮤직비디오, 어린이 프로그램

 

수많은 비디오 게임과 영화

 

음악과 춤에 녹아 있어요

 

만국 공통의 언어죠

 

사람들은 무술에서
필요한 부분을 취합니다

 

무술을 비틀고 뒤섞죠

 

농담이 아니라
10배는 진화했어요

 

옛날이었다면
못 믿을 일이죠

 

키아누 리브스가
쿵푸를 하고

 

쿵푸 영화가
오스카상을 타다니

 

상상도 못 할 일이에요

 

우와

 

쿵푸 영화는

 

예술, 아름다움

 

움직임

 

유산의 집합체예요

 

역사가 담겨 있죠

 

그 기반은 경극입니다

 

정통 경극 공연을 보게 되면

 

아름다워요

 

아름다움과 기교

 

우아함과 스타일까지

 

모든 것의 집합체죠

 

전부 담겨 있어요

 

한 편의 춤 같죠

 

경극의 주제는 주로

 

세대를 걸쳐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입니다

 

이러한 주제는 고스란히

 

21세기 홍콩으로 이어졌죠

 

"홍콩"

 

100년 전 홍콩은

 

척박한 돌섬이었지만

 

오늘날 가장 바쁘고 붐비는
도시가 됐습니다

 

새로운 산업에 맞춰
건물들이 들어서고

 

전 세계에 판매되는 상품을
생산하죠

 

모든 사람이 홍콩에 모여들었어요

 

목적은 돈이었죠
60년대 홍콩은

 

제조업이 성행하여
시멘트 공장부터

 

조화, 단추, 라디오 등
온갖 공장이 있었어요

 

경공업의 집합소였죠

 

홍콩은 당시에도
먹고살기 팍팍한 곳이었어요

 

즐거운 시간을 위해
극장을 찾는 것은

 

공동체나 가족 모임 같은 행사죠

 

홍콩은

 

영국 식민지였습니다

 

홍콩 사람들에게 영화 제작이란

 

단순한 오락 활동을 넘어서

 

중국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방식이었죠

 

홍콩은 쇼 브라더스 전에도
영화사가 많았지만

 

쇼 브라더스야말로
홍콩 영화사의 패왕이었어요

 

런런 쇼는 영연방의 외딴곳을

 

할리우드로 만들고 있습니다

 

매주 영화를 제작해서
수익을 거두고 있죠

 

세계 최대 규모의

 

영화 제작 및 배급사의 소유주로서

 

연간 1억 파운드를 벌어들입니다

 

저는 대중이 원하는 것을

 

다른 제작자들보다 잘 파악합니다

 

쇼 브라더스는
점점 더 많은 영화를 만들었어요

 

소속 스타와 배우들이 있었고

 

잡지도 자체 발간하고

 

사운드 스테이지
작곡가, 편집자에

 

카메라와 조명을 갖춰서

 

모든 것을 자체적으로 해결했죠

 

쇼 브라더스는
대중성이 있는 것을 제작했어요

 

경극을 각색하고

 

고전을 각색했죠

 

첩보물도 몇 편 있었고

 

로맨스와 뮤지컬은 셀 수 없죠

 

쇼 브라더스는 60년대 말에

 

이렇게 우아하고
꿈 같은 영화를 버리고

 

날것의 현실과 흥미진진한 결투를
영화에 담기로 했죠

 

쿵푸는 경극의 열정을 담고

 

스포츠의 활동성과

 

발레의 곡예를 결합했어요

 

제게 쇼 브라더스 영화는
세실 B. 드밀의 '십계'와 같았어요

 

풍부한 테크니컬러에

 

현실을 잊을 수 있었죠

 

쇼 브라더스는
쿵푸 영화라는 장르의

 

스타일, 느낌부터

 

소리, 연기 방식을 꿰고 있었어요

 

전문가였죠

 

쇼 브라더스의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칼싸움의 음향 효과였어요

 

훌륭했죠

 

음향을 디자인하는 방식은

 

장르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합니다

 

당시엔 사람들이 화면 앞에서

 

마스터 녹음 장치를 틀어 놓고

 

말 그대로 음향 효과를

 

연기에 맞춰서 입혔어요

 

일반적으로

 

믹싱 콘솔 담당은 3명이었는데

 

오픈릴 테이프 녹음기를
1대씩 맡았어요

 

영화를 보면서

 

실시간으로

 

테이프를 잽싸게 끼우고

 

감아서 녹음했죠

 

두어 명이 거기 붙어 앉아서

 

줄담배를 피워 대는데

 

아마 72시간은 걸렸을 겁니다

 

그땐 방에 틀어박혀서

 

영화 하나를 끝내야

 

밖에 나갈 수 있는데

 

3편이 더 들어왔죠

 

낮에 찍고 밤에 찍고
또 낮에 찍었어요

 

"쇼 브라더스 영화사"

 

동시에 6편까지
찍어 본 적 있습니다

 

공장처럼 찍어 냈고

 

배우, 스턴트 배우와

 

기술자가 기숙 생활을 했죠

 

그래서 빨리 찍어 낼 수 있었죠

 

한 번에 두세 편씩 찍었어요

 

배우와 촬영팀이
기숙 생활을 하면

 

관리가 훨씬 수월해지죠

 

물론입니다

 

그들이 무엇을 하는지

 

숙소를 언제 나가고 들어오는지
파악할 수 있죠

 

외출이 너무 잦으면 주의를 줍니다

 

런런 쇼 밑에서 일한다는 건

 

모나 팡 밑에도
있다는 거였어요

 

런런 쇼와 연인이 됐다가
부부의 연을 맺었는데

 

런런 쇼의 제작사 대표가
되기도 했죠

 

홍콩 영화사에서
모나 팡보다

 

미움을 받거나 중요했던 여성을
찾기란 힘듭니다

 

모나 팡은
예산 절감의 도사였어요

 

바닥에 끌리는 의상 길이를
무릎 높이로 줄이고

 

180cm짜리 창을
90cm로 줄이니

 

현장에 온 감독은
황당할 수밖에요

 

90cm짜리 창을
위협적으로 찍어야 하니까요

 

70년대 들어
쇼 브라더스의 큰 문제는

 

너무 커지고
힘이 세진 것이었습니다

 

뭘 결정하든
반성할 필요가 없었어요

 

아주 오랫동안
그들의 결정은

 

전부 옳았으니까요

 

그래서 누가 쇼 브라더스를 찾아가
브루스 리를 소개하며

 

써 볼 것을 제안했을 때
런런 쇼의 반응은

 

쿵푸 나부랭이라며 무시했죠

 

비틀즈를 퇴짜 놓는 것과 같은
엄청난 실수였어요

 

홍콩은 극도로
남성 중심적이었고

 

영화의 관객은
오직 주부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부들이
미남에게 열광하지 않도록

 

주인공인 영웅은
전부 여성 배우가 맡았어요

 

60년대 후반
최초의 스타 여성 배우는

 

후진취안의 '대취협'에 출현한
정페이페이였어요

 

홍콩에 처음 갔을 때

 

모든 게 희한했어요

 

영화에 출연하기로 했던 건

 

순전히 무용 교습 때문이었죠

 

무용이 들어가면
싸움이 더 부드러워져요

 

페이페이는 싸움을 춤으로 봤고

 

결투 장면을 보면
춤인 게 확실히 보입니다

 

재미있는 게

 

문화 엘리트 층이
쿵푸 영화를 무시한다는 건데

 

발레와 다를 게 없어요

 

점차 저만의 스타일이 됐어요

 

정페이페이의 이미지는
남자들에게 둘러싸였다가

 

전부 압살하는 거예요

 

정말 대단한 게

 

홍콩에서 그런 장면이
한참 예전에 나왔다는 거예요

 

사람들은 곱게 차려입은 여성을
매일 보고 싶어 하진 않아요

 

저는 언제나 싸우는 게 좋았죠

 

옛날 홍콩 영화에는

 

정말로 무술을 하는
여배우가 등장해요

 

정페이페이는

 

실제로 액션을 할 수 있죠

 

다양한 결투 장면을
롱 테이크로 담을 수 있어요

 

제겐 특별한 일이었어요

 

처음에는

 

소녀인데

 

싸울 줄 아는 소녀를 연기했죠

 

그다음부터는

 

출연하는 영화마다
처음부터 끝까지 싸웠어요

 

"1967년"

 

홍콩 주룽반도의
거리 폭동이

 

사흘 연속 이어지면서

 

경찰이 대거 투입됐습니다

 

1967년에

 

홍콩은 불타고 있었어요

 

조화 공장 노동자들이

 

파업을 벌였는데

 

경찰이 강경 진압을 하면서

 

경찰의 만행이 알려졌고

 

홍콩이 폭발했죠

 

시위대와 경찰이 충돌하면서

 

50명이 사망했고

 

기자들은 폭탄 테러로

 

차 안에서 불타 죽었어요

 

정말 끔찍한 시기였죠

 

경찰 발표에 따르면

 

폭도들이 국가 기관만 닥치는 대로

 

테러하는 듯하다고 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나온 영화에는

 

분노하고 젊으며

 

더는 참지 않고

 

잃을 게 없는 인물들이 등장했죠

 

'의리의 사나이 외팔이'는

 

주인공이
아버지가 살해당한 젊은이로

 

아버지의 유일한 유품인
부러진 검을 지니고 있죠

 

"의리의 사나이 외팔이"

 

장처 감독은
전형적인 쇼 브라더스 검객 영화가

 

고루해지고 재미없어졌음을
꿰뚫어 봤습니다

 

새로운 것을 시도했어요

 

피를 더 튀기고

 

검이 몸을 관통해서

 

반대편으로 나온 걸 보여 주고

 

팔다리도 잘랐죠

 

사람 내장이

 

나오는 장면이 있는데요

 

어떻게 관객을 끌어들이시죠?

 

관객들이 시시하다면
피를 더 뿌리는 거죠

 

장처 감독님의 결투 장면을
찍었는데

 

폭력을 아름다움으로 승화시키세요

 

인물이 죽을 때 쓰는
슬로 모션이 백미죠

 

장처는 마초적인 걸 좋아했어요

 

여성을 등장시키지 않고

 

전통적인 남성 영웅으로의
회귀를 원했죠

 

보통 웃통을 벗고

 

가슴이 번들거리죠

 

음인 여성들을 없애고

 

양인 사나이들을 넣었습니다

 

의리가 있는 사나이죠

 

장처는 남자들을 결투를 붙여서

 

내장이 쏟아지고
유혈이 낭자한 걸 좋아했습니다

 

장 감독님은 진지한 사람이었어요

 

스태프를 꾸짖기도 했는데

 

저한테는 그런 적 없어요

 

'의리의 사나이 외팔이'는
당시 시대상을 담았어요

 

분노에 찬 젊은이가

 

정부에 맞서는데

 

손에 든 건 부러진 검뿐이죠

 

결백한 사람이

 

압제자와 싸우는 이미지

 

빈곤층과 권력층의 대결

 

관객들의 반응은 즉각적이었어요

 

신선했죠

 

이에 왕위는 묘안이 떠올랐어요

 

영화에서 칼로 싸우는데

 

맨주먹으로 쿵푸를 해 보자고요

 

그리고 꼴 보기 싫은 일본인과
싸우자고요

 

그래서 직접 각본과 감독을 맡아

 

'용호의 결투'를 만들었죠

 

그리고 쿵푸 영화라는
엄청난 포문이 열렸습니다

 

너도나도 할 것 없이

 

분노에 찬 중국 젊은이가

 

무술의 고수와
검으로 싸우는 것이 아니라

 

일본 압제자 얼굴에
주먹을 꽂는 것을 보려 했죠

 

어마어마했어요

 

홍콩 영화의 육체적 매력이
극에 달한 작품이죠

 

우리 모두 힘들게 살고
상대에게 한 방 먹이고 싶었는데

 

쿵푸 영화에서 그게 실현돼요

 

쿵푸 영화는
홍콩의 무언가를 건드렸고

 

관객은 쿵푸 영화를 찾았습니다

 

영화 속 인물에게
뭔가 빚진 게 아니라

 

현실 속 사람들에게 빚진 거죠

 

매일 버스를 기다리며 만나거나

 

사무실, 공장과

 

길에서 보는 사람들요

 

1967년 홍콩 영화 제작의
폭발적인 증가는

 

이러한 젊은 에너지를 포착했어요

 

뭐든 할 수 있다는 정신 말이죠

 

오로지 맨손으로

 

세상을 막아 세우고
날 보게 하는 겁니다

 

그 사상은 홍콩에서 뻗어 나가

 

미국 관객을 열광시켰습니다

 

"미국"

 

미국의 흑인 민권 운동이
절정에 달한 시기였어요

 

베트남 반전 운동이
절정에 달한 시기였죠

 

젊은이들의 저항이
도처에서 벌어졌어요

 

말보다 행동이 중요할 때가 있죠

 

실은 그런 때가 많아요

 

원시적인 내용이잖아요

 

국경을 초월하죠

 

싸움은 만국 공통이지만

 

그 표현 방식은
시기가 맞아야 해요

 

뭔가가 반향을 일으키면
어떻게 될지 몰라요

 

내 오른발로

 

그쪽 얼굴을 갈길 거다

 

그리고 말이야

 

넌 손가락 하나도 까딱 못 해

 

그러신가?

 

그래

 

"빌리 잭"

 

'빌리 잭'이 개봉했고

 

혼자 대치하는 장면이 있어요

 

자신을 둘러싼 8명을
발차기로 제압하고

 

빠져나가죠

 

한바탕 날뛰어 볼까!

 

어딜 가도 그의 이야기가 들립니다

 

- 빌리 잭
- 빌리는 베트남전 참전 용사로

 

빌리가 영웅인 이유는

 

사람들을 구하고자
기꺼이 목숨을 걸기 때문입니다

 

폭력이 좋아서
폭력을 쓰는 게 아니라

 

미국 원주민을 지키기 위한 것으로

 

본인 역시 원주민으로
그들과 친구였죠

 

빌리 잭이 지키고자 하는 것은
본인 한 몸이 아니었어요

 

"빌리 잭"

 

영화사에서 영화를 개봉하고
몇몇 극장이 적자가 나자

 

영화를 톰 로플린에게 돌려줬고

 

톰이 재개봉해서
70년대에 1억 달러나 벌어들였죠

 

평범한 사람이 영웅이라는 건

 

특히 노동자들에게
큰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저는 세 번째
애들은 두 번째 보는 거예요

 

사람들이 10번, 12번씩
다시 보러 와요

 

다 같이 다시 보러 오기로 했어요

 

미국, 서구 세계에서

 

빌리 잭이
최초의 액션 영웅일 겁니다

 

이런 영화의 80%는

 

아주 평범한 사람이 주인공이고

 

항상

 

무언가와 맞서 싸워요

 

압제 또는 독재나

 

파시즘이나 정부와 항상 싸우죠

 

심지어 인종 차별과도요

 

그러나 그런 영화보다도

 

물론 브루스 리가 있었죠

 

엄청난 스타였어요

 

쿵푸 스타 브루스 리가 등장하자

 

다들 브루스 리가
되고 싶어 했어요

 

브루스 리는 쿵푸 천재예요

 

아주 일찍부터

 

자신의 길을 알고 있었죠

 

영국인, 유대인, 중국인
혼혈이어서

 

어린 시절에

 

홍콩에서 양쪽 모두로부터
차별을 받았어요

 

브루스 리는 미국에서
영웅이 되고 싶었고

 

미국에 와서
원형을 만들고 싶다고

 

처음으로 말한 사람이었습니다

 

바로 중국인 쿵푸 고수죠

 

브루스가 처음 맡았던 역은

 

'그린 호넷'의 가토였어요

 

'그린 호넷'은
'배트맨'의 스핀오프로 시작했어요

 

그래서 '배트맨'에
그린 호넷과 가토가 등장했고

 

미국 가정에 무술은 물론

 

브루스 리를 알리는 데
도움이 됐죠

 

어릴 땐 이유를 몰랐어요

 

아빠와 브루스 삼촌이
같이 운동하면

 

다들 담장을 넘어다봤고

 

계속 '가토'라고 하는 거예요

 

완전히 드라마에 빠졌던 거죠

 

브루스 리를 TV에서 봤을 때

 

멋지다고 생각했어요

 

다음 날 애들은
전부 난리였어요

 

발차기로 악당을 날리는 모습이
얼마나 멋졌고

 

도대체 누구인지 말이죠

 

사람들은 거리에서
브루스 리를 흉내냈어요

 

제 친구들은
무술 도장에 다니기 시작했죠

 

그 직후

 

'쿵푸' 시리즈에 푹 빠졌어요

 

데이비드 캐러딘이 출연했죠

 

전 서부에서 자랐고
서부를 좋아했으니까요

 

미국의 서부 TV 드라마는

 

굵직한 작품들이 많았어요

 

'딜론 보안관', '보난자' 등이
있었는데

 

70년대 초에 사라지기 시작했죠

 

'쿵푸'가 처음 방송됐을 때

 

평범한 서부 드라마 같은데

 

설정이 독특했어요

 

당시에 관해 기억해야 할 게

 

반문화예요

 

베트남 전쟁이 한창이었을 때라

 

여러모로
중국에 관한 드라마를 하는 것은

 

베트남에 관한 드라마를
하는 거였어요

 

아시아인은 평화를 사랑하고

 

잠옷 같은 것을 입고 있죠

 

카우보이도 등장하는데
미군을 상징해요

 

중국 친구
머리를 박살 내 주지

 

반응이 뜨거웠는데
특히 젊은 층이 난리였죠

 

그 드라마를 보면

 

반문화 시위에 동참하는
느낌이었으니까요

 

저를 포함한 그 누구도

 

이렇게 크게 될지 몰랐어요

 

서부 배경의 쿵푸를 보면서

 

저는 '쿵푸' 트레이딩 카드나

 

관련 상품을 수집했어요

 

그 드라마 방영 전엔
쿵푸가 뭔지 아무도 몰랐어요

 

하지만 드라마가 끝난 뒤...

 

중국이나 아시아 문화와
무술에 관한 관심이

 

폭발적으로 늘어났죠

 

'쿵푸'는 멋진 드라마였지만

 

솔직히 좀 이상했어요

 

진짜 중국인 같지 않았거든요

 

당시 할리우드에는

 

유라시아 쿵푸 고수가
한 명밖에 없었잖아요

 

브루스 리뿐이었죠

 

브루스 리는
큰 딜레마에 빠졌습니다

 

미국에서 TV 드라마 출연으로

 

스타덤 진입이 코앞인데요

 

브루스는 동양과 서양이 섞인
쿵푸물을 구상 중이었어요

 

주먹으로 치고 발로 차는 폭력을

 

정당하게 쓰려면

 

서부가 배경이 돼야 해요

 

제작사는 브루스의 생각에
흥미가 있었고

 

좋은 아이디어라고 생각했지만
브루스의 억양 때문에

 

배역을 맡기긴 어렵다는 걸
알고 있었죠

 

그때 갑자기
워너 브러더스가

 

브루스가 구상한 것과
비슷한 드라마를 내놓은 거죠

 

브루스는 충격을
심하게 받았어요

 

큰 기회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죠

 

브루스는 배역을 따지 못해서
중국으로 갔어요

 

이렇게 되뇌었죠

 

'배역을 딸 수 없다면
할리우스에 있어서 뭐 해?'

 

제작사는 좀 더
서구적인 외모에

 

서구적인 억양의 배우를
원했습니다

 

데이비드 캐러딘은
첫 오디션에서 약에 너무 취해서

 

오디션을 망쳤어요

 

그런데도
두 번째 오디션 기회가 있었죠

 

데이비드 캐러딘의
아시아 억양을 따라할 수 있어요

 

아주... 천천히...
말하는 거죠

 

이게 다예요
억양이랄 게 없죠

 

명상하러... 산에...

 

가야겠어

 

쿵푸나 가라테를
원래 할 줄 알았어요?

 

아뇨

 

명칭은

 

두 번 들어 봤어요

 

쿵푸를 전혀 모르는
마약쟁이 백인에게

 

유라시아 쿵푸 고수이자

 

역사상 가장 유명한 무술가가

 

배역을 뺏긴 거죠

 

미국이 원래 그런 곳이었잖아요

 

묵은 술을 새 부대에 담는 걸 보면
놀랍다니까요

 

제2차 세계 대전이 터지고

 

아시아계 미국인은
주인공에서 제외됐어요

 

심지어 중국인 배역을
캐스팅할 때도

 

예를 들어
푸 만추나 찰리 챈 같은 배역을

 

은신처를 발견한 건
밀납 인형 뒤쪽에

 

갑자기
숨길 수 없는 흉터가 생겨서...

 

백인에게 맡겨
동양인 분장을 시켰죠

 

동양인 분장 시기는
더 비판 받아야 해요

 

할리우드 전통 중
정말 끔찍한 부분이죠

 

어릴 때 TV나 영화에서

 

아시아인이 호의적으로 나온 적은
거의 없었습니다

 

주로 하인이나

 

누군가를 돌보는 역할이죠

 

아시아 여성은 요부거나

 

악녀로 나와요

 

남성은 조직원으로 나오죠

 

저는 그 사실을 알고

 

무술을 멀리 하려고 했어요

 

두려웠거든요

 

진부할까 봐요
하지만 나쁠 거 없잖아요?

 

아시아 인물이 무술을 하는 게
잘못된 건 아니잖아요

 

아시아 인물이 무술밖에
못 할 때가 문제인 거죠

 

입체적이고 목소리를 내는 인물이
되고 싶다는 거죠

 

우리가 전부 쿵푸를 하진 않아요

 

안 그래요?

 

1960년대 말에서 1970년대 초에

 

전 세계 영화사가
대부분 파산했습니다

 

컬러 TV가 등장했기 때문이죠

 

"홍콩"

 

그러나 홍콩에서는

 

쇼 브라더스의 임원들인

 

쩌우원화이, 허관창, 차이융창은

 

영화 산업의 지향점에 관해

 

다른 결론을 내렸습니다

 

기본적으로 그들의 신념은

 

좋은 영화를 만들면
관객이 찾는다는 거였죠

 

그래서 세 사람은 독립해서
골든 하비스트를 설립했습니다

 

골든 하비스트는 쇼 브라더스가
몰랐던 길을 알았습니다

 

미래는 무술이 아니라

 

스타에게 있다는 것을요

 

우린 함께 일하던 배우가
몇 명 없었는데

 

가장 영향력 있는 건
브루스 리라는 젊은 미국 배우였죠

 

자신에게 뭔가 있다는 걸
알고 있지만

 

사람들이 믿어 주지 않아
화가 난 친구였죠

 

서구권 진출에
가장 좋은 위치에 있었는데

 

영화 스타가 되는 법을
알고 있었거든요

 

홍콩에 머물면서
유명해질 겁니까?

 

미국에서 유명해질 겁니까?
두 마리 토끼를

 

- 다 잡을 건가요?
- 다 잡을 겁니다

 

미국은 동양적인 것을 봐야 해요

 

브루스와 저는 공통점이 많아서
친구가 됐어요

 

저는 브루스의 열망을
이해할 수 있었어요

 

국제 시장용 영화를
만들고 싶어 했죠

 

"당산대형
브루스 리"

 

초기 브루스 리 영화의
흥미로운 점은

 

본인의 영화 경력을
빗댄 거라는 거죠

 

'당산대형'을 잘 보면
스크린 테스트예요

 

원래는

 

톈쥔이 주인공을
맡기로 했었거든요

 

3막이 진행되려면
둘 중 한 명은 죽어야 하는데

 

누구를 죽이겠어요?

 

감독은 촬영본을 홍콩에 보냈고

 

검토 결과
톈쥔을 죽이기로 결정났죠

 

브루스 리의 결투 방식은

 

홍콩에서 그야말로 혁신이었습니다

 

감독이 브루스에게 주문한 것은

 

경극 스타일의 무술로

 

탁, 탁, 탁 하는 느낌이었어요

 

브루스가 원하는 건
차차차 스타일이이었죠

 

하나, 둘, 셋, 발차기

 

하나, 둘, 셋, 정지

 

브루스 리는 춤을 좋아했어요

 

박자를 중요하게 생각했거든요

 

브루스는 홍콩 영화 사상
가장 빠른 액션을

 

원했습니다

 

브루스가 주먹을 날리면

 

일부러 3초 더 길게 끌었습니다

 

두 번째 주먹은
날릴 필요 없다는 뜻이었죠

 

결투의 마무리가 가장 중요했어요

 

감독은 그것을 싫어했어요

 

영화 한 편을 찍어야 하는데

 

각본은 3쪽밖에 안 됐죠

 

감독은 쩌우원화이에게

 

브루스를 해고하라고 했어요

 

브루스는 감독을 해고하라고 했죠

 

브루스는 주인공 자리를 지켰고
영화는 성공했어요

 

간단히 말해
'당산대형'이 개봉하고

 

홍콩의 역대 흥행 기록을
갈아치웠죠

 

맨해튼 사람들이 점심시간에

 

합을 맞춘 가라테 시범을 즐깁니다

 

물론 이들은 전문가라
병원에 실려가는 사람은 없죠

 

브루스 리를 정말 화나게 한 건

 

미국에서 가라테가 유행하고
다들 배우길 원했다는 거예요

 

중국 쿵푸는 아무도 몰랐죠

 

그래서 브루스 리는
'당산대형'을 찍어서

 

중국 쿵푸로 언제든지
일본 가라테 고수들을

 

이길 수 있음을 보여 줬습니다

 

'당산대형'은 홍콩 역사상

 

가장 강력한
민족주의 반일 영화입니다

 

두 장면이 유명하죠

 

브루스 리가 가다가
어떤 현판을 보는데

 

'개와 중국인 출입 금지'라고
돼 있어요

 

발차기로 부숴 버리죠

 

그 장면이 나오면

 

사람들이 환호하고 박수를 쳐요

 

홍콩 관객은

 

열광했죠

 

그런 장면은
홍콩 영화에서 처음이었어요

 

그런 현판은 미국에도 있었어요

 

대신 흑인과 멕시코인이었죠

 

그 장면을 본 사람들은

 

브루스 리와 그의 민족이

 

동질감을 느꼈어요

 

관객들은 화면 속 인물들에게서

 

아는 사람들을 봤던 거예요

 

두 번째 장면은 브루스 리가

 

도장에 돌아가 일본인에게
결투를 청하는 장면이죠

 

'동아시아의 병자'라고 적힌
커다란 현판이 있는데

 

브루스는 일본인을 보고 말해요

 

"우리는 병자가 아니다"

 

그 대사에 홍콩 관객들은
열광의 도가니에 빠졌어요

 

그 대사에
중국의 민족주의가 동한 거죠

 

애국심이 아니라 민족주의요

 

중국인은 병자가 아닙니다

 

브루스, 쩌우원화이와

 

모두는 순식간에 깨달았어요

 

저류가 흐르고 있었다는 것을요

 

홍콩 관객들은

 

중국인이 추악한 외국인에게

 

맞서는 것을 즐겼습니다

 

영화가 주는 메시지는

 

충분한 실력이 있다면
주먹과 발차기로

 

불의를 극복할 수 있다는 거죠

 

힘과 긍지가 있는 중국인이

 

주먹으로 길을 뚫고

 

존경을 얻어낸다는 겁니다

 

달라고 빈 게 아니라
얻어낸 거죠

 

브루스 리는 세계 무대에
메시지를 전했어요

 

브루스는
전 세계의 탄압 받는 이들에게

 

본인 식으로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너무나 명확하게요

 

쿵푸 영화의 영웅들은

 

강한 사람도
존 웨인도 아니었어요

 

평범한 사람들이죠

 

작고 깡마르고 가난한

 

농민, 노동자들이

 

쿵푸를 배워 실력을 기르고

 

시간과 노력을 들여 훈련한 끝에

 

압제자를 이길 수 있게 되죠

 

사람들은

 

약하고 억압받는 이들이

 

일어나는 모습을 좋아해요

 

화면 속 누군가가

 

그렇게 하는 걸 보면
큰 격려가 되죠

 

주인공이 모든 걸 가졌고
모든 걸 잘하고

 

뭐든 성공하는 영화는 매력 없어요

 

저놈은 절대 못 올라와요

 

우리 모두 약자를 응원하고 싶죠

 

브루스 리의 상황도 같았어요

 

본인을 끌어내리려는 세력과
맞섰죠

 

'당산대형' 이후, 브루스 리는
완전히 스타였어요

 

홍콩의 스티브 매퀸이었죠

 

본인이 직접

 

감독, 각본, 주연을
맡고 싶어 했어요

 

그래서 '맹룡과강'을 만들죠

 

척 노리스에게 악역을 부탁했어요

 

누가 이기느냐고 척이 묻자

 

브루스는
주인공인 본인이라고 했죠

 

'맹룡과강'은

 

예술가로서 브루스의
가장 행복한 시절을 상징해요

 

작품의 모든 부분에
브루스의 손길이 닿았으니까요

 

브루스 삼촌이
직접 각본과 감독부터

 

제작까지 맡은 이유 중 하나는

 

본인의 철학을 표현할 방법이
미디어였기 때문이에요

 

모든 사람에게서 모든 걸 배우고

 

모든 걸 할 수 있게 되면

 

자신에게 가장 잘 맞는 것을
고르는 거죠

 

척 노리스와의 결투 장면에선

 

결투가 진행되는 중에
전법이 바뀌는 것을

 

볼 수 있어요

 

착한 사람이 당하고 있다가

 

어느 순간

 

호흡과 발놀림을 바꿔서

 

갑자기 전법이 바뀌고

 

판세가 기울어지죠

 

결투에 이야기가 생겼다는 점이
흥미로운 거예요

 

인물이 어떻게 역경을 이기고

 

극복하는 과정을 볼 수 있죠

 

전법과 마음가짐을 바꾸면

 

신체적 능력이 향상돼서

 

상대를 이기는데
처음 전법을 계속 썼다면

 

못 이겼을 거라는 게
요점이에요

 

이 결투 장면은
최고의 무술 결투 장면으로 꼽혀요

 

한 번은 편지를 받았는데

 

결투 장면에서
제가 브루스를 바닥으로 엎어치고

 

브루스가 제 가슴털을
움켜쥐거든요

 

브루스가 진짜 가슴털을
뽑은 거냐더군요

 

진짜 털이면
제가 정말 사나이라고요

 

제가 어릴 때 브루스 리 영화는

 

편집이 너무나 형편없어서

 

골목길 장면 전체가 빠졌어요

 

그래서 브루스 리가
골목에서 나오다가

 

곧바로 다시 들어가는데

 

엄청 빨리 해치웠구나 생각했어요

 

잡아!

 

그 장면을 보면

 

브루스 리는 정말 무적이에요

 

다들 상상에서만이라도
무적이 되고 싶잖아요

 

영화 제작에
14만 5천 달러가 들었고

 

전 세계에서 6천만 달러 이상을
벌어들였죠

 

"맹룡과강"

 

우리는 매우 운이 좋았고
엄청난 과업을 해냈어요

 

골든 하비스트는
중국 밖 세상을 알아봤던 거죠

 

그러나 쇼 브라더스는
서구를 신경 쓰지 않았어요

 

바깥 세상을 봤지만
마음에 들지 않았던 거죠

 

혼란스럽고
너무나 다른 시장이었거든요

 

그러나 워너 브러더스가
'죽음의 다섯 손가락'을 사들여

 

미국에 개봉했을 때

 

엄청나게 히트했어요

 

"뉴욕"

 

워너 브러더스의 리오 그린필드가

 

보여 주고 싶은 영화가 있다더군요

 

자기 쪽으로 와서
함께 영화를 보고

 

제 생각을 들려 달라고 했어요

 

영화가 끝나고 전 말했죠

 

돈방석에 앉겠다고요

 

워너 브러더스는 영화를 골라서

 

쿵푸 영화에 시장성이 있을지

 

거의 시험 삼아서 개봉했어요

 

대문짝만한 신문 광고에
무료 상영회를 열었어요

 

극장에 가득찬 관객들은
뭘 보게 될지 몰랐어요

 

첫 번째 장면에서
나이 든 무인이

 

공중 발차기로
적 두 명을 동시에 쓰러뜨리자

 

관객들은 난리가 났죠

 

인물들이 점프한 뒤 공중에서
공격을 주고받았을 때

 

다들 감탄을 금치 못했어요

 

그때까지 본 어떤 영화보다

 

강렬한 육탄전이었죠

 

오로지 결투를 위한 영화였어요

 

그 강렬함에

 

관객들은 매료됐고

 

다음 상황을 궁금해했어요

 

영화에 푹 빠졌죠

 

그리고 군중들이 등장해서
환호할 때

 

관객들은 흥분을 금치 못했어요

 

포스터, 배지, 스티커
닥치는 대로 샀죠

 

다들 그 영화를
보러 가라고 했어요

 

제가 처음 본 무술 영화가
'죽음의 다섯 손가락'이에요

 

‘죽음의 다섯 손가락’

 

‘죽음의 다섯 손가락’

 

‘죽음의 다섯 손가락’

 

‘죽음의 다섯 손가락’

 

당시 저는 너무 어려서

 

눈알을 뽑는 장면에서
기절할 뻔했어요

 

그 영화를 백만 번은 봤을 겁니다

 

그런 영화는 처음이었어요

 

워너 브러더스는 큰 성공을 거뒀죠

 

곧바로

 

소규모 독립 배급사들이 앞다퉈서

 

쟁탈전을 벌였죠

 

진행 중인 작품이 꽤 있었고
배급사들은 기다렸어요

 

다음 영화를 받기 위해
영어로 더빙했고

 

- 쉽겠군
- 편집을 좀 다듬어서

 

미국 전역의 B급 영화관에
개봉했어요

 

그즈음 연 평균 예닐곱 편을
골랐어요

 

영화들을 보면

 

유명한 미국 영화의

 

사운드 트랙과
유명한 곡들을

 

그대로 영화에 썼더군요

 

지금도 기억나는 게

 

짧은 기간에 사들인 영화 중에

 

'샤프트'의 사운드 트랙을 쓴
영화가 4편이나 있었어요

 

'원수'라는 영화가 있었는데

 

잔인한 액션의 항연이었어요

 

담배로 눈을 지지는 장면도 있죠

 

그래서 포스터를 만들 때

 

인물이 손을 내밀고 있고

 

그 위에 피가 떨어지는
눈알 두 개를 올렸어요

 

여주인공 소개에는

 

자링이라는 본명 대신

 

주디 리라고 붙여서

 

광고를 내보냈어요

 

각목을 콧대를 후려 치는
느낌이었어요

 

그건 저한테 너무나 중요했습니다

 

한때 42번가 극장들이
전부 제 손에 있었거든요

 

당시 세계 최고의 영화 시장이었죠

 

7번가와 8번가 사이 42번가에는

 

극장들이 늘어서 있었어요

 

영화 장르는 딱 두 가지였습니다

 

포르노와 쿵푸였죠

 

일반 동네 극장에서는

 

볼 수 없는 영화를 보기에

 

안성맞춤인 곳이었어요

 

아침 8시부터 정오까지

 

입장료는 2달러였죠

 

연달아 서너 편을 봤어요

 

극장은 지저분했지만
너무나 재밌었어요

 

영화를 보려고 일단 앉으면

 

발이 떨어지지 않았어요

 

쏟긴 음료수로
바닥이 끈끈해서요

 

쥐들도 왔다갔다했죠

 

좋고 나쁜 걸
가릴 수 없으니까

 

그냥 극장에 앉아서

 

영화를 즐길밖에요

 

틈새 시장에 적중했어요

 

하지만 틈새 정도가 아니라

 

진짜 열망이 있었죠

 

쿵푸 영화들이
미국 영화를 앞지르면서

 

다들 어안이 벙벙했어요

 

농담이지만
할리우드는 돈이 전부예요

 

쿵푸가 돈이 된다는 걸 깨닫자

 

브루스 리에게 기회를 주기로 했죠

 

영화 '용쟁호투'는

 

홍콩과 미국의
최초 대형 합작 영화였어요

 

할리우드는 단독 주연으로
브루스 리가 못 미더워서

 

백인, 흑인, 동양인을 세웠죠

 

동양인 단독 주연의 영화가
미국에서 실패할까 두려웠거든요

 

브루스가 한 가장 중요한 일은
할리우드 촬영진이 떠난 뒤

 

'용쟁호투'의 오프닝 장면을
찍은 것으로

 

전부 브루스가 도맡았어요

 

감독, 작가, 주연을 맡았고

 

영화 앞부분에 삽입돼서
주인공으로 부각됐죠

 

브루스 리가 웃통을 벗고

 

괴조움을 지르기 시작하는데
그런 건 처음 봤어요

 

브루스 리를 보고
무술 영화를 찍고 싶어졌죠

 

저는 어릴 때 소심한 아이였어요

 

어두운 게 무서워서
밤에도 불을 못 껐죠

 

브루스 리의 영화를 보고서

 

저런 게 남자라고 생각했어요

 

두려움을
극복해야 한다는 걸 배웠죠

 

브루스는 서구 사회에
쿵푸 영웅을 만들어 냈어요

 

마치 카우보이나

 

사무라이를 만든 것과
같은 수준이죠

 

미국의 10대 소년들 방엔
포스터가 두 장 있었어요

 

하나는 빨간 수영복 차림의
파라 포셋이고

 

나머지는 '용쟁호투'의
브루스 리였죠

 

당시 전 세계에서
가장 흥행한 영화였어요

 

그래서 영화사는
돈이 된다는 걸 알았지만

 

우리나 쇼 브라더스와
손을 잡지 않았습니다

 

어떤 영화사의 배급 책임자가
절 보면서 말했죠

 

쿵푸 영화를
절대 사지 않겠다더군요

 

미국답지 않다고요

 

미국 영화에서는

 

주인공이 주먹을 날리고

 

총을 꺼내 상대를 쏜다면서

 

상대를 발로 차는 것은
미국답지 않은데

 

우리 중국 배우들이
상대를 발로 찬다더군요

 

그런데 6개월도 안 돼서

 

'용쟁호투'가 개봉했고

 

영화를 더 사고 싶어 안달했죠

 

"1973년 7월 25일"

 

"슈퍼스타 브루스 리 사망"

 

"홍콩에 브루스 리 애도 물결"

 

"브루스 리"

 

특정 나이대의 홍콩 사람과
얘기할 때

 

미국 사람이
케네디 대통령 암살 때를 기억하듯

 

브루스 리 사망 소식을
들은 순간을 기억해요

 

홍콩 사람 5만 명이
거리를 채웠습니다

 

미국에서는 '용쟁호투'가
한 달 뒤에 개봉했죠

 

그때 브루스 리가 슈퍼스타가 돼요

 

브루스 리의 흥미로운 점은

 

젊은 나이에 사망해서
사후에 명성을 얻은

 

20세기의
유일한 아이콘이라는 거죠

 

브루스는 사망해서
시간에 갇혔어요

 

또 다른 시작이었어요

 

브루스 리는
영화 속 인물 자체였고

 

브루스의 삶은 팬들을 위해
재창조될 수 있었죠

 

브루스의 힘을 보고
본인의 힘을 키울 수 있어요

 

브루스가 백 년, 천 년 더
사랑받는다면

 

쿵푸의 신이 되겠죠

 

마음을 비웁니다

 

마치 물처럼
형태에 구애받지 않는 거죠

 

물은 흘러갈 수도
뭔가를 파괴할 수도 있습니다

 

물이 되세요, 이렇게요

 

고 브루스 리는

 

가장 위대한 현대 무술가로
평가해야 합니다

 

브루스 리가 사망한 뒤는
쿵푸 열풍의 절정이었고

 

갑자기 골든 하비스트는
황금알을 낳는 거위를 잃었고

 

할리우드 역시 마찬가지였죠

 

홍콩은 혼란에 빠졌어요

 

7시 뉴스입니다

 

어젯밤 월드 스타 브루스 리가
급성 심장 마비로 사망했습니다

 

혼수상태로
병원으로 급히 이송됐습니다

 

이봐, 저 사람은...

 

브루스 리잖아
데려온다더니

 

그래서 가장 정중하고 의미 있으며
세련된 일을

 

하기로 했습니다

 

- 자네 이름도 브루스 리인가?
- 네

 

브루스 리와
닮은 사람들을 찾아서

 

브루스 리처럼 괴조음을 내고
무술을 하게 한 거죠

 

이름은 브루스 라이라고
붙였어요

 

브루스 레

 

브루스 런

 

브루스 플리

 

브루스 타이도 있었죠

 

한국 브루스 리도 있었고

 

아프리카계 미국인
브루스 리도 있었습니다

 

다들 우후죽순 나타났고

 

전부 저예산 졸속 영화였어요

 

브루스 우려먹기는
전통처럼 됐죠

 

그런 영화가 50편이 넘어요

 

정말 저질 영화들이

 

시장에 끝도 없이 쏟아져 나왔죠

 

그럼에도 배급사들은
착각한 관객들이

 

표를 팔아 줄 거라고 믿었어요

 

제가 어릴 때 아버지가

 

맨해튼 일대에서
아동 영화를 제작했어요

 

아버지는 집이 저당 잡힌 상태라

 

좋은 방법을
생각해 내야 한다고 했죠

 

전 브루스 리만큼
멋진 걸 본 적 없었어요

 

브루스가 출연했던 '그린 호넷'을

 

살펴보기로 했죠

 

전 그 드라마를 편집해서
영화로 만들자고 했고

 

아버지는 좋은 생각이라고 했지만

 

브루스 리가 워낙 스타라서

 

저작권을 못 살 것 같다더군요

 

아버지가 캘리포니아에 가서
저작권을 살 수 있었어요

 

왜냐하면 20세기 폭스는

 

그 드라마가 실패했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리고 우리에게
필름 22개를 보냈죠

 

저는 코흘리개 때부터

 

오픈 릴 테이프 녹음기 사용법과
각종 편집 방법을 알고 있었어요

 

부모님이 영화 사업을 하셨고
집 지하실에서

 

영화를 편집했거든요

 

그래서 세 편을 골라 편집했고

 

아버지는 이것저것
추가하자고 했어요

 

음향 효과와 다른 것들을 추가했죠

 

역대급 스릴과 위험이
브루스 리를 기다리고 있으니

 

브루스 리가 돌아왔다

 

아버지는 42번가 극장 한 곳에
영화를 걸었어요

 

모퉁이 너머까지 줄이 이어졌죠

 

저는 설마 '그린 호넷'을 보러 온
사람들일까 싶었고

 

아버지도 설마설마했어요

 

사람들은 복도에 서서

 

소리치고 환호했어요

 

사설 잘 봤습니다

 

그렇게 신나는 일은 처음이었어요

 

영화가 성공하자 다들 당황했지만

 

우리 부자는 아니었어요
아버지는 절 믿었고

 

해내셨어요
수화기 두 개를 동시에 들고

 

'브루스 리 영화 어때요?'

 

'그린 호넷 있어요'
정말 신나는 시절이었죠

 

브루스 우려먹기 영화를 보면
입이 딱 벌어져요

 

좋은 의미와 나쁜 의미 둘 다로요

 

브루스는 사망하기 전에
'사망유희'를 찍던 중이었어요

 

30분 가량 촬영했죠

 

브루스 리의 부인에게
자신이 돌봐주겠다며

 

브루스를 존경했다고 말한

 

골든 하비스트의 쩌우원화이는

 

브루스 리의 '사망유희' 촬영분을
가져갔어요

 

그리고 7분으로 편집해 버렸고

 

거기에 맞게 각본을 써야 했는데

 

브루스의 아이디어를 버리고
본인들 뜻대로 했죠

 

쩌우원화이는 탕룽이라고 개명한
한국인을 고용해

 

몇몇 장면에서는
브루스 리 종이 가면을 씌워서

 

브루스 리를 죽인 자를
찾는 내용으로 분량을 채웠죠

 

결국 여기까지 왔군

 

이 모습에서

 

이 모습으로

 

브루스 리 사망 후 찍은 장면은
전혀 브루스 리 같지 않았어요

 

'외계로부터의 9호 계획'에서

 

벨라 루고시가 사망한 뒤
전혀 다르게 생긴 배우를

 

대역으로 쓴 것처럼요

 

브루스 리의 가족들 심정이
어땠겠어요?

 

영화에서 누가
죽은 브루스 리인 척하는데

 

기가 막힐 정도로
실력이 형편없잖아요

 

틈틈이 실제 본인도 나오고요

 

보고 있으면 거북해요

 

특히 브루스의 장례식 화면을
넣기까지 했죠

 

그건 심했어요

 

'사망유희'의 놀라운 점은

 

형편없는 쿵푸 영화지만

 

브루스 리 등장까지만 참으면

 

그의 영화를 볼 수 있고

 

천재를 본다는 게 무엇인지
떠올릴 수 있다는 거죠

 

브루스 리의 영상 덕분에
영화는 대흥행했고

 

큰돈을 벌어들였지만
영화 자체는 무례하고

 

고인을 모독하는 것이었죠

 

저는 약 6편의
브루스 리 영화를 거래했어요

 

3편은 브루스 리가
실제로 나오는데

 

'공포의 주먹, 죽음의 손길'이
그중 한 편이죠

 

제가 가진 촬영본 중에

 

어린 시절 브루스의 모습이 있어요

 

40분이 안 될 거예요

 

90분짜리로 만들기 위해

 

앞뒤로 살을 붙였죠

 

테리에겐 브루스 리의 흑백 영화와

 

사무라이 영화가 있었는데

 

그 두 편을 짜깁기하려고 했어요

 

전 진심이냐고 물었죠

 

테리는 그 사무라이 영화를

 

브루스의 증조부를
회상하는 장면으로

 

넣자더군요

 

저는 황당해서

 

브루스는 중국인이고

 

사무라이는 일본인이라고 했지만

 

그건 걱정 말라더군요

 

브루스의 흑백 영상에

 

테리가 더빙할 수 있냐고 묻길래

 

그렇다고 했어요

 

어머니, 오늘 가라테 수업을
보셨어야 하는데

 

저 검은띠 땄어요

 

이봐, 브루스

 

잭!
수, 우리 형이 돌아왔어

 

테리가 더빙 대본을 주지 않아서

 

적당히 지어낼 수밖에 없었어요

 

영상을 보면서
뭐라고 하는 걸까 물으면

 

테리는 말했죠

 

스테이크는 미디엄 레어로
괜찮냐고 묻는 것 같다고요

 

- 그런 식으로 했어요
- 어머니가 틀렸어

 

옛날엔 그렇지 않았어

 

'공포의 주먹, 죽음의 손길'은

 

어마어마한 흥행 수익을 거뒀어요

 

일부 사람들의 마음을
전적으로 이해해요

 

이 영화가 브루스 리와 그 전설에
먹칠을 하는 거라고요

 

저는 브루스를 욕되게 할 의도가
전혀 없었습니다

 

저는 브루스 리 다큐멘터리 제작차
홍콩으로 향했습니다

 

아무 문제 없었고
제가 탄 비행기가

 

착륙했을 때
특종이 터졌어요

 

브루스 리의
사망 소식이었죠

 

저는 홍콩에서
제작사를 만나

 

좋은 소재를 찾아서

 

호주에서 제작비 절반을
모을 테니

 

나머지 반을 댈 생각 있냐고
물었어요

 

'용쟁호투' 제작 덕분에

 

합작이 가능하다는 걸
알고 있었어요

 

합작을 하기 위해서는

 

중국 시장에 통할 만한 이야기를

 

준비해야 하는데

 

국제 시장에도 통해야 해요

 

저는 그런 영화를 만들고 싶었고

 

재미있겠다고 떠오른 소재가

 

범죄자 송환으로 홍콩에서 온
중국의 '더티 해리'였죠

 

그래서 각본이 나왔는데

 

제목이 끔찍하게도 '황화'였어요

 

고정 관념을 가져다가

 

뒤집고 싶었거든요

 

지금껏 만난 중국인은

 

전부 겁쟁이였어

 

하지만 홍콩에서 큰일날
일이었기에

 

우린 가장 먼저

 

브라이언에게
제목을 바꾸라고 했어요

 

그게 '스카이 하이'의
시작이었어요

 

"호주"

 

왕위는

 

홍콩 출신입니다

 

당시 왕위는
골든 하비스트 소속이었고

 

우리가 브루스 리와 일하면서
배웠던 것을 바탕으로

 

왕위를 키울 생각이었습니다

 

공동 제작자
안드레 모건과 함께

 

아시아의 국제 스타 왕위가
'스카이 하이' 촬영차

 

시드니에 도착했습니다

 

왕위는 아시아의 스티브 매퀸으로
평가받으며

 

세계적으로 엄청난 흥행을 거두는
최고의 액션 스타 꿈꿉니다

 

조지 레이전비 역시
우리 소속이어서

 

왕위는 영웅, 조지 레이전비는
악당을 맡겼습니다

 

그리고 전 영화에

 

'007' 느낌을 주고 싶었죠

 

'스카이 하이'는
호주와 중국의 첫 합작 영화였어요

 

중국어와 영어를 섞어 쓰는

 

초창기 실험작이었죠

 

여기는 호주야

 

더는 헛소리 마

 

훙진바오는 골든 하비스트의
떠오르는 신인이었어요

 

액션 배우라고 하는데

 

외모가 색달랐어요

 

뚱뚱했지만 전부 근육이었죠

 

실제로 배를 쳐 보면

 

주먹이 아팠어요

 

훙진바오가 호주의 붉은 사막으로
가는 장면이 있어요

 

훙진바오는 영어를 전혀 못 하고

 

우리도 중국어를 전혀 못 하죠

 

다음 목적지는 에어즈록입니다

 

호주에서 가장 유명한 암석층이죠

 

세계에서는 아니지만요

 

그곳은 마약상이

 

호주 사막으로 2,500km 들어가서
마약 거래를 하는 곳이었어요

 

체포를 피해 달아나려면

 

사막으로 뛰겠어요?

 

270m짜리 바위를
올라가겠어요?

 

270m짜리 바위로
올라가야죠

 

홍진바오와 저는

 

수화와 가짜 펀치로
합을 맞췄어요

 

그런 방식으로

 

에어즈록 결투 장면을 연출했죠

 

누가 보냈어?

 

"엉덩이에 머리나 처박아라"

 

그래, 나도 사랑해

 

저는 싸움이 지저분하길 원했어요

 

쿵푸로 길거리 싸움을 하는 거죠

 

청소년 관람 불가 등급 밑으로는
고환을 차면 안 돼요

 

신사적인 행동이 전혀 아니죠

 

저는 작정을 하고 결투 장면마다

 

최대한 많이 사타구니를 걷어차고

 

고환을 쥐어짰죠

 

홍콩에 개봉했지만
성적이 시원치 않았어요

 

미국에서는 개봉 못 했는데

 

20세기 폭스가

 

영화를 사서
일부러 창고에 처박았기 때문이죠

 

행글라이딩에 관한 자기네 영화를
보호하기 위해서요

 

'스카이 하이'에
행글라이딩 장면이 있었으니

 

창고에 처박아서

 

미국 개봉을 막은 거죠

 

하지만 '스카이 하이'라는
삽입곡 때문에

 

개봉할 수밖에 없었고

 

그 노래는 그 해 여름에

 

세계적으로 대히트를 쳤어요

 

그 노래로 벌어들인 수익이

 

영화 수익과 맞먹었습니다

 

영화는 어떤 시장에서도
먹힐 리 없었어요

 

이도 저도 아니었으니까요

 

영어로 미국 영화를 만들거나

 

중국 영화를 만들어야지
두 가지를 섞으면 실패해요

 

"뉴욕"

 

그러나 골든 하비스트의 영화는
특정 집단에 반향을 일으켰어요

 

아프리카계 미국인 공동체였죠

 

왜냐하면 영화에

 

권력과 사람에 맞서는 메시지가
담겨 있으니까요

 

영화에 대한 극장주들의 반응은

 

미국 흑인들에게
먹힐 거라는 거였죠

 

그와 동시에

 

관객들은 부족함을 느꼈어요

 

그래서 흑인 영웅을
보여 주기로 했죠

 

보아라

 

 

드래곤

 

켈리

 

짐 켈리는

 

저의 우상이었어요

 

실력이 매우 뛰어난 무술가였죠

 

가슴이 너무 아픈 게

 

짐 켈리는 영화 산업에
상처를 많이 받았어요

 

한 번도 출연료를
제대로 못 받았죠

 

가장 중요한 일이야

 

나도 그래

 

'용쟁호투'에 짐 켈리가 출연하고

 

영화 출연을 꿈꾸는
모든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에게

 

짐 켈리는 기준이 됐어요

 

우리도 할 수 있다고 깨달았죠

 

블랙 드래곤
론 반 클리프를 소개합니다

 

우린 입을 닫고
이제 그의 이야기를 들어 보죠

 

영화에서 쿵푸 배우들을 보고

 

언젠간 나도
저렇게 되겠다고 했어요

 

아버지는 무슨 소리를 하냐면서

 

저더러 미쳤다고

 

취직이나 하라더군요

 

미국에서 가장 무서운 남자에게
임무가 주어졌습니다

 

그 이름은 론 반 클리프

 

저는 경찰을 그만두고

 

홍콩으로 갔어요

 

저는 홍콩 영화 최초의

 

흑인 주인공으로
희소가치가 있었죠

 

- 화장한 거예요?
- 아뇨, 진짜 피부예요

 

내 얼굴에 관심 있는 줄 몰랐네

 

하지만 난 있어, 새대가리야

 

블랙 드래곤의 영화를 봤을 때

 

또 누군가가 해냈구나 싶었어요

 

희망이 생겼죠

 

영화는 할렘에서 상영됐고

 

브루클린, 퀸즈와

 

- 롱아일랜드에서 상영됐죠
- 당시에 정말 화제였어요

 

타임스스퀘어에서

 

영화를 위해 시범회도 열었죠

 

중간 휴식 시간에
당근 5개를

 

5명 목에 놓고
칼로 자르기도 했어요

 

블랙 드래곤으로
영화 10편에 출연했어요

 

이놈들이 괴롭혀요?

 

이 은혜를 어떻게 갚죠?

 

론에게 생각이 있는 것 같군요

 

유색 인종이 주인공인 영화가
여러 편 나왔어요

 

"검은띠 존스"

 

"해결사"

 

곡예나 공중제비 따위는 없습니다

 

이건 진짜거든요

 

흑인들이 멋있게 나와서

 

결투를 벌여
마지막엔 영웅이 되죠

 

- 원하는 게 뭐야, 자기?
- 누구더러 자기래?

 

가능성이 보였어요
영화로 손색없었죠

 

제임스 본드에 뒤지지 않는
흑인 여성들

 

의상, 얼굴, 헤어스타일까지
완벽했죠

 

우리는 흑인으로서

 

영화에서 우리의 모습을 봤어요

 

스크린에 등장한 것은

 

하얀 백인이 아니었어요

 

해보자고?

 

저는 그들의 모습을 따라 했어요

 

그들은 저의 영웅이었고

 

저의 꿈이었죠

 

흥미로운 점은
워너 브러더스가 의도적으로

 

쇼 브라더스에서

 

저작권을 사 들인 쿵푸 영화를

 

흑인 쿵푸 영화와
같이 배급한 거예요

 

같은 극장에서 상영했어요

 

흑인 쿵푸 영화와
홍콩 쿵푸 영화를요

 

관객층이 거의 똑같다는 것을
깨달았죠

 

흑인 쿵푸 영화와
홍콩 쿵푸 영화로

 

수익을 두 배로 올렸죠

 

아프리카계 미국인 공동체는

 

홍콩 영화의 열렬한 팬층이었어요

 

"홍콩"

 

이 남중국해 항구는

 

브루클린과 다릅니다

 

뉴욕과 마찬가지로
70년대 홍콩은 정말 가난했어요

 

극장에 가서 한 시간 반 동안
현실에서 벗어났죠

 

쇼 브라더스는
꿈의 중국을 창조했어요

 

대중은 변화를 원하고

 

우린 새로운 사상을
불어넣어야 합니다

 

70년대를 통틀어

 

쇼 브라더스는 시대상을 담았어요

 

무술 감독으로 시작한 류자량은

 

영화 감독까지 맡으면서

 

최고의 무술 영화를 제작해 냈죠

 

브루스 리는 세계에 쿵푸를 알렸고

 

류자량이야말로

 

그 아이디어를 이해하고
실현한 사람이에요

 

류자량은 쿵푸 영화에
실제 쿵푸를

 

담아야 한다고 했어요

 

독수리 권법 대 호랑이 권법 대
표범 권법을 상세히 담았어요

 

다른 수십 편의 영화에서는
한 장면으로 끝나는 소재였죠

 

저는 쇼 브라더스 영화를 볼 때

 

숫자 세는 걸 좋아합니다

 

한 장면이 전환되기까지
얼마나 이어지는지요

 

1, 2, 3, 4, 5, 6

 

숫자가 올라갈수록

 

그 장면을 찍어내는 게

 

얼마나 대단한지 깨닫죠

 

골목에서 결투를 벌이는데

 

골목이 엄청나게 좁아지고

 

완전히 다른 무술을 선보여요

 

이 거리에서 팔꿈치를 쓰겠다

 

3.5m 간격의 벽 사이에서
합을 주고받다가

 

이것은 호랑이 권법이다

 

2.5m로 줄어들고

 

2m, 0.5m까지 줄어요

 

화면 속 액션과 이야기에

 

스타일을 맞출 수 있는 거죠

 

제 생각에

 

영화의 생명은

 

에너지의 교환입니다

 

카메라 앞 배우와 관객이
주고받아야 하죠

 

효과적인 각도를 찾는 건
대단한 일입니다

 

촬영 감독으로서
굉장한 도전이죠

 

배우들이 뭘 하는지
전혀 모르겠거든요

 

모르겠어요

 

슈퍼히어로 같은 남자와 여자가

 

얼마나 빠른지

 

굉장한 볼거리였어요

 

류자량이 보여 주고자 한 건

 

속도, 힘, 타격감이었고

 

관객이 느끼는 것에 집중했어요

 

저는 류 사부님을
정말 존경했고

 

제 마음 속
영웅이셨습니다

 

류자량 영화 중
한층 색다른 경극 느낌을 주는 게

 

'더티 호'였어요

 

제목을 본 사람들은
예외 없이 웃었지만

 

호는 주인공의 이름이죠

 

'더티 호'는
복잡하고 멋진 무술 영화의

 

정점을 찍은 사례입니다

 

그 영화의 명장면은 술집에서

 

왕룽웨이가 여러 술을 내는데

 

술 이름이

 

술병과도 어울릴 뿐더러

 

용호주입니다

 

쿵푸 권법과도 어울리죠

 

그때 두 사람은
공격과 방어를 주고받는데

 

술집 안 사람들은
뭐가 뭔지 전혀 몰라요

 

아주 고급스럽고 수준이 높죠

 

또한 친형제 류자후이와
'소림 36방'을 만들었어요

 

'소림 36방'은

 

최고의 쿵푸 영화예요

 

다혈질의 젊은이가 주인공인데

 

소림사에 숨어들어 가서

 

소림사 쿵푸를 배우기로 하죠

 

사부님, 쿵푸를 가르쳐 주십시오

 

1방부터 35방까지 훈련을 거쳐요

 

매 방마다 새로운 과제가 주어지죠

 

머리로 모래주머니를
옮기는 과제도 있어요

 

촛불을 따라서
눈을 움직이는 과제도 있고요

 

무술가는 모든 장애를 극복하고

 

자신을 단련해야 하며

 

기술을 연마해야 하죠

 

반드시 통과해야 해
아니면 더 높이 못 가느니라

 

'록키'의 훈련 장면을 보면

 

이 80년대 훈련 장면의 뿌리는

 

'소림 36방'에 있어요

 

주인공이 훈련에서 익히는 것을
결국 사용하게 돼요

 

보다 보면 매료돼요

 

주인공이 훈련을 통해 서서히

 

다혈질 애송이에서
내면이 단단한 인간으로 성장하여

 

거의 부처의 경지에 이르러요

 

자신보다 큰 무언가 있음을
즉, 쿵푸를 배웠기 때문이죠

 

"뉴욕"

 

우리 모두 의무가 있었어요

 

자신을 단련해야 했죠

 

내게서 총은 빼앗을 수 있지만

 

이건 빼앗을 수 없으니까요

 

브루클린 다리의 북쪽은

 

앨프리드 스미스의
주택 사업 지역이었어요

 

저는 당시 영화 감독이었는데

 

어느 날...

 

체육관에서

 

어마어마한 소리가 들렸어요

 

알고 보니

 

무술 수련생들이더군요

 

저와 영화를 찍고 싶다고 했어요

 

이 영화 제목은
'죽음의 생존술'입니다

 

도시적인 쿵푸 영화 같았어요

 

로어이스트사이드에
쿵푸 도장을 운영하는 흑인이

 

라이벌 쿵푸 도장 사범과 맞붙어요

 

정신과 마음이 훈련을 통해

 

강해진다는 게

 

영화의 주제죠

 

서로 자기네 도장이 낫다고

 

주장하다가 결국 맞붙는 거죠

 

쿵푸 예술 영화예요

 

저는 항상 지역 사회에
기여하고 있다고 생각했죠

 

"죽음의 생존술"

 

이 지역을 위해 힘써 준

 

- 정치인이 있었습니까?
- 아뇨

 

건물을 고치려는 정치인이 없어요

 

아무것도 하지 않죠

 

"브롱크스"

 

그 시절 브롱크스는 황무지였어요

 

집주인들은 폭력배를 사주해
건물에 불을 지르고

 

보험금을 챙겼죠

 

이런 상황에서 힙합이 탄생했어요

 

힙합을 통해 우리는 손을 들고

 

내 존재, 재능, 가능성을 드러냈죠

 

빈민가에 사는 아이들은

 

힙합이라는 움직임을 함께했고

 

다 같이 쿵푸 영화를 보러 갔어요

 

'오둔인술', '오독'

 

'중화장부', '광동십호'

 

모두 쿵푸 영화를 봤어요

 

래퍼, DJ 할 거 없이
안 보는 사람이 없었죠

 

종일 42번가에 있으면서

 

극장을 전전했어요

 

일요일마다 갔어요

 

극장에 가면
재밌는 사람들이 있어서

 

때맞춰 무슨 말을 했고
극장이 웃음바다가 됐죠

 

'이 멍청아'

 

'놈이 저기에 있잖아, 숨어'

 

필름이 망가지는 때도 있었어요

 

음향이 잘못돼서

 

이상하게 들릴 때도 있었죠

 

'누가 막 내린 거 보러 왔냐'

 

'악당이 당하는 걸 보러 왔다고'

 

그럼 우린 서로 웃긴 짓을 했어요

 

결투 장면을 흉내냈죠

 

영화를 4번은 봐요

 

처음엔 발과 손을 보고

 

다음엔 던지기와 다른 것을 보고

 

그렇게 친구와 동작을 나눠 보면서
기술을 익혔죠

 

수많은 비 보이들이
무술 영화에 푹 빠졌어요

 

제가 제일 좋아하는 영화는
'호표용사응'이에요

 

제 춤의 기반이 그 영화죠

 

내 명예가 여기에 달렸다

 

그 소원을 들어 주지

 

우리가 본 것은

 

힙합 배틀의 정수였어요

 

덤벼, 뭘 기다려?

 

비 보이가
다른 지역 비 보이에게 도전해요

 

춤 스타일을 겨루는 거지만

 

결투의 성격을 가지고 있어요

 

자기 스타일이 낫다고 겨루는 건

 

다 쿵푸 영화에서 나온 거예요

 

상대가

 

위대한 고수라고

 

인정해 주는 거죠

 

우린 고수가 아니에요

 

그렇게 상상을 하는 거죠

 

인정과 존경을 하는데

 

그보다 힙합다운 게
어디 있죠?

 

쿵푸 영화에서

 

처음 보는 몸놀림으로
악당을 혼내는 걸 봐요

 

쿵푸 영화 속 배우들은

 

어깨를 땅에 대고

 

발차기를 하죠

 

윈드밀은 쿵푸 영화 속
특정 동작과 매우 유사해요

 

'신타'의 오프닝 시퀀스에

 

가위 차기를 하는 사람들이 나와요

 

등으로 낙법을 하기도 하고요

 

또 다른 브레이크 댄스
스타일이 있는데

 

브루클린에서 나온 업록이에요

 

한 사람씩 나와서

 

서로 춤을 보여 주고
들어가는 식이죠

 

중국 무술과 다를 게 전혀 없어요

 

저는 취권을 춤으로 응용했어요

 

솔직히 제 춤 스타일 자체가
취권에서 왔죠

 

이미 존재하던 것이지만
표현 방식이 확장돼 갔죠

 

수많은 지역에서 춤 덕분에

 

싸움이 급격하게 줄어들었어요

 

그들이 하는 말은 이거예요

 

훔치고 찌르는 것 말고
많은 걸 할 수 있다고요

 

춤을 추면서
가난한 집에서 벗어났고

 

남의 집에 들어가는 일도 없어졌죠

 

우리 모두는

 

예술적 영감을 창조해 갔고

 

제대로 만들어지면

 

공중제비 동작을 넣었죠

 

일종의 샘플링이었어요

 

문화가 서로 소통하는 거죠

 

우린 쿵푸를 비틀고

 

다시 섞어서
새롭게 탄생시켰죠

 

바다를 건너 끊임없이
소통하는 셈이었어요

 

이 점에서 '정봉적수'는
아주 흥미로운 영화예요

 

홍콩 배경의
브레이크 댄스 영화였죠

 

도입부에서 주인공이

 

옷을 입는 데
팝핀과 락킹을 하고

 

문워크도 해요

 

쿵푸라는 문화가

 

힙합과 결합하는 모습을

 

보게 돼서 즐거웠죠

 

쿵푸가 먼저 영향을 줬는데

 

나름의 형태를 갖추고
기능하게 됐죠

 

이 빌어먹을 랩을 주목해 보자고

 

이 당시 쿵푸 영화를 상영한
많은 극장은

 

도심에 있었습니다

 

교외의 많은 아이들은

 

기본적으로 백인이었는데

 

부모가 도시로 데려가는 걸
내키지 않아 했죠

 

그래서 TV로 내보냈어요

 

"교외"

 

쿵푸 영화가

 

42번가를 넘어
TV 방송국에 진출하면서

 

모두가 보게 됐어요

 

필라델피아, 샌프란시스코, LA
신시내티, 호놀룰루까지

 

종일 밖에 있던 사람들이

 

집 안에서 쿵푸 영화를 봤어요

 

그러면서 70년대 우리처럼
또 다른 아이들 세대가

 

영향을 받았고

 

쿵푸 영화에 중독되고

 

빠져들었어요

 

신비로운 극동 세계로의 여정

 

쿵푸 고수들의
경의롭고도 위험한 세계

 

TV를 보며

 

쿵푸 영화를 사랑하게 됐어요

 

가장 처음 본 영화는

 

'마영정'이었어요

 

지금도 TV에서 그 영화만큼

 

피가 많이 튀는 걸 본 적 없어요

 

천관타이가

 

영화 마지막 10분 내내

 

배가 도끼가 박힌 채 싸워요

 

토요일 오후 4시였는데

 

지금 생각해도 충격이죠

 

쿵푸 영화가
아이들에게 좋았던 이유는

 

기본적으로

 

잘 훈련하고

 

배울 각오가 있다면

 

못 이룰 게 없다는 걸
보여주니까요

 

사실 말도 안 되는 거죠

 

론 반 클리프입니다
'자동차 극장' 시간입니다

 

오늘 영화는 푸성이 출연하는
'차이나타운 키드'입니다

 

이건 그 친구의 몫이다

 

영어 국가 수출용으로

 

홍콩에서 제작된 영화로

 

수많은 대사가 영어로 더빙됐죠

 

- 너희는 날 몰라
- 잘 알아

 

당나귀처럼 발차기를 한다는
루의 부하잖아

 

우린 더빙을 따라 하며 놀았어요

 

어이, 어디 가려고?

 

이봐, 무슨 소리야?

 

나의 쿵푸가 더 뛰어나다

 

영화를 더빙할 때

 

으르렁거리고
시끄러운 소리를 냈어요

 

더빙에 12시간 정도 걸렸죠

 

한 편 더빙하면서
6명이 맥주 72병을 마셨어요

 

보나마나 취했겠죠

 

좀 더 중국어처럼 해
방금은 영어 같았어

 

저는 항상 메모를 하면서

 

입 모양을 맞추려고 했어요

 

더빙을 마음대로 하신다고요?

 

원래 대사대로 해야죠
말이 안 되잖아요

 

아뇨, 뭐라고 하든
상관없어요

 

'사는 게 지겨운가 보군'
이 대사를 좋아해요

 

입 모양이 맞거든요

 

입이 너무 많이 움직여요

 

너무 많이요

 

제가 제일 좋아하는 영화는
'의리의 사나이 외팔이'인데

 

'이 두 손으로 널 죽여 주마'
라는 대사가 있었어요

 

완벽하지 않았어요

 

평균도 못 미칠 때도 있었죠

 

유니콘, 그리고 오른쪽

 

'소권괴초'에서
청룽 성우를 맡았어요

 

최근에 다시 봤는데

 

내가 뭐라고 가르쳤냐?

 

공부하고
생각하고 행동하라고요

 

그리고?

 

열심히 수련하고
남을 도우라고요

 

솔직히 충격이었어요
10분도 겨우 봤죠

 

창피했어요

 

대체 왜 날 공격했나?

 

"1980년대"

 

홍콩은 80년대로 넘어가면서

 

경제가 급격히 성장했고
쇼는 또 대어를 놓쳤어요

 

누가 청룽과 함께
쇼 브라더스를 찾아가서

 

재미있고 인기 많은 배우라고
계약을 제안했지만

 

쇼는 거절했죠

 

비틀즈를 퇴짜 놓는 것과 같은
엄청난 실수였어요

 

청룽은 골든 하비스트로 갔고

 

사람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건

 

쿵푸 코미디임을 깨달았고

 

사람들은 열광했어요

 

위안허핑이 '사형도수'라는 영화를
감독했습니다

 

청룽이

 

무술 도장의 심부름꾼으로
등장해요

 

네가 뭘 알아?

 

그러다
진짜 고수가 되는 법을 배우죠

 

이 영화가 최초로

 

흥행한 쿵푸 코미디였어요

 

청룽은 제2의 브루스 리가
아니었어요

 

새로운 브루스 리는
필요 없었죠

 

내 스타일을 만들어야죠

 

영화를 보도록
관객을 끌어들여야 해요

 

이야기와 코미디는 그다음이죠

 

영화는 재미있었고
청룽의 개성이

 

화면에서 폭발했어요

 

폭력이 없고

 

액션도 없고

 

고난이도 스턴트가 없으면
관객은 안 봐요

 

청룽은 항상 롤모델로
버스터 키튼을 꼽았어요

 

버스터 키튼의 스턴트에서

 

청룽의 코믹 액션이 나온 거죠

 

레디, 액션

 

관객에게

 

안전 장치 없이
12m 높이에서 떨어지는 것을

 

보여주고 싶나요?

 

스턴트와 영화는 제 인생이에요

 

늘 농담으로
특수 효과 예산이 없으니까

 

우리가 곧 특수 효과라고 했어요

 

어떻게 세상의 관심을 끌까요?

 

직접 떨어지면 됩니다

 

난 미친 게 아니에요

 

기발한 생각이죠

 

청룽이 공간을 활용하는 걸 보면

 

입이 떡 벌어져요

 

와이드 숏으로

 

전체 장면을 찍으면

 

전부 다 보여요

 

온 세트장을 누비는데
세트장 하나가 아니라

 

다른 세트장으로 넘어가고

 

또 넘어가요

 

청룽은 자신만의 스타일로

 

곡예 능력을 활용해서

 

벽을 빨리 오르거나

 

탁자를 넘거나
탁자 위를 미끄러지거나

 

뒤집는 법을 익혔어요

 

청룽은 파쿠르 액션의

 

선구자죠

 

"파리"

 

우리는 사회에 살면서
사각의 틀 속에서

 

모든 게 안전하길 바라죠

 

저는 탈출하고 싶었어요

 

밖에 나가서 색다른 걸 하고

 

긍정적인 일을 찾죠

 

제겐 에너지와 떨림이 중요해요

 

늘 그렇게 생각했고

 

저라는 사람의 일부죠

 

무술 영화를 보면서
청룽에게 큰 영향을 받았어요

 

영감을 받았죠

 

우리에게 씨앗을 심은 것처럼요

 

제 고향의 아이들은

 

아주 독특한 건물이 있는데

 

그곳을 목각 인형 삼아
연습할 수 있었어요

 

하다 보면 엄청난 에너지가

 

생기는데

 

전부 무술 영화를 통해 얻은 거죠

 

파쿠르를 보면

 

청룽의 도심 추격전과

 

다르지 않습니다

 

파쿠르는 전선 없는
전선 작업 같아요

 

내가 초자연적인 존재처럼
느껴지죠

 

벽 타기라는 게 있는데

 

환경을 바꾸면

 

벽은 벽이 아니고
벤치는 벤치가 아니게 돼요

 

청룽도 같은 환경을 이용하죠

 

우리도 환경을 이용해요

 

우리가 유행시킨 현상이고

 

이 분야가 이렇게 유명해진 건

 

우리 덕분이죠

 

하지만 우리에게 계기를 준
사람들도 있어요

 

영감을 주고받는 거죠

 

80년대에 홍콩 영화는
현대적으로 변화했고

 

거기엔 청룽과 훙진바오가
있었어요

 

다만 영화 속 주인공은

 

사무직 노동자가 됐죠

 

줄거리는 상관없었어요

 

중요한 건

 

곡예 장면과 웃긴 장면을

 

쿵푸로 연결하는 것이었죠

 

스턴트 배우도

 

떨어지는 법, 점프하는 법과

 

창문이나 벽을 뚫는 법을
알아야 했어요

 

매 영화마다 관객에게
새로운 것을 보여 줘야 했어요

 

제 영화를 보는 관객들이

 

행복하길 바랐죠

 

훙진바오보다
잘하는 사람은 없어요

 

정말 최고의 무술 감독이죠

 

'칠복성'에서

 

훙진바오가 자기 다리에 의자를
휘두르면 공중제비를 해서

 

제 발에 착지하겠다는데
솔직히 저는

 

스턴트 배우를 찾았어요

 

홍진바오는
그 장면을 30번이나 찍었고

 

어떤 사람인지 다들 아시잖아요

 

청룽 말대로 외모는 코끼리지만
몸놀림은 원숭이예요

 

훙진바오에게 중요한 건

 

타격감이었어요
세게 때리는 걸 원했죠

 

본인이 세게 때리는 만큼

 

상대도 세게 때리길 바랐어요

 

아파?

 

카메라가 여기 있어서

 

얼굴을 가까이 대고 있는데
훙진바오가

 

맨주먹으로 어퍼컷을 날렸어요

 

훙진바오와 결투신을 찍던
초반 며칠간

 

이 촬영을 해낸다면

 

못 할게 없겠구나 싶었어요

 

사람들은 현대적인 영화를 원했고

 

골든 하비스트는

 

액션 코미디 영화로
당시를 평정했어요

 

쇼 브라더스는
관객이 원하는 것에서

 

한 발 뒤쳐져 있었죠

 

"쇼 브라더스"

 

쇼 브라더스는
서서히 시들해졌어요

 

결국 1986년 쇼 브라더스는

 

망했죠

 

TV 방송 제작사에

 

클리어워터베이 사운드 스테이지가
넘어갔어요

 

그들은 영화 촬영 중이던 류자량을
버렸어요

 

우리 문 닫으니까 행운을 빈다며
그대로 떠났죠

 

그들은 TVB 전속으로 옮겨서

 

수백만 달러를 더 벌어들이면서

 

가장 크고 힘 있는 제작사가 되어

 

무술 드라마부터

 

시대물, 로맨스, 현대물
경찰물을 제작했죠

 

골든 하비스트는 알고
쇼 브라더스가 몰랐던 것은

 

지속적인 신인 발굴의
필요성이었어요

 

외국에서 오디션을 열고
새로운 걸 보는 거죠

 

가라테는 제가 1등이에요

 

그리고 KFC는 치킨 1등이죠

 

얼마나 맛있는지...

 

저는 가라테 세계 챔피언을
5번이나 했어요

 

'인사이드 쿵푸'지 편집장이
알려주더군요

 

어떤 중국 제작사가 있는데

 

LA에서 오디션을 연다고요

 

제2의 브루스 리를 찾는다더군요

 

전 싸움, 호신술, 무기 사용
시범을 보였고

 

웬콰이는 절 뽑았죠

 

제 홍콩 영화 데뷔작은
'예스 마담'이었어요

 

당황스러웠어요

 

영화 촬영은 처음이었거든요

 

물러서, 아니면 이 여자 죽어

 

영어 대사는 없었고

 

전 제가 뭐라고 하는지 몰랐어요

 

계속 이렇게만 했죠

 

그럼 컷 사인과 칭찬이 나왔어요

 

대사를 제대로 못 했다고 했는데

 

상관없다고 하더군요

 

웬카이는 여배우 두 명을 쓰는
큰 모험을 했어요

 

아가씨들 실력 좀 볼까?

 

신시아와 량쯔충의
마지막 결투 장면은

 

둘 다 끝내줬어요

 

두 사람 내면의 힘이

 

렌즈를 통해서

 

관객에게 전해졌고

 

아주 멋졌죠

 

영화는 성공했고

 

전 골든 하비스트와
영화 3편을 찍기로 계약했어요

 

어때, 아가씨?

 

내 쿵푸 실력 볼래?

 

당연히 보고 싶지, 이 쓰레기

 

홍콩의 촬영 방식은
미국과 크게 달랐어요

 

우린 각본이 없었죠

 

'마비취'를 찍을 때

 

감독이 천장을 보라고 했어요

 

제가 이유를 물으니까

 

그건 걱정 말라더군요

 

완성된 영화를 보니까

 

외계인이 침략해
우릴 공격하는데

 

저 정도는 중요하니까
말해 주지 싶었죠

 

영화 속 외계인은

 

지점토 같은 것으로 만든

 

꼬마 같았어요

 

저는 신시아 로스록과

 

영화 9편을 찍었어요

 

제 실력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해요

 

상대가 형편없으면

 

저도 형편없어 보이죠

 

영화를 찍는데
무술 실력이 부족하다면

 

관객들에게 다 들켜서
흥행에 실패해요

 

싸움에는 흐름이 있고

 

갖가지 구성 요소들이 있어요

 

결투 장면에서
그걸 놓치면 안 되죠

 

홍콩 영화 촬영은
힘든 걸로 손에 꼽아요

 

부상이 일상이죠

 

홍콩 액션은 가혹해요

 

'지분쌍웅'이라는 영화의
액션 장면을 보면

 

훙진바오가 차에 치이는데

 

몸이 꺾이면 안 될 방향으로
꺾여요

 

얼마나 입원했냐니까
병원에 안 갔대요

 

그래서 홍콩 액션 영화가
독특한 거예요

 

안전을 최우선으로 생각하지 않죠

 

"청룽
뉴 폴리스 스토리"

 

청룽이 건물 꼭대기 세 층을
폭파하는 장면이

 

영화에 있어요

 

카메라 15대가 동원됐고

 

마침내 촬영이 시작됐죠

 

폭탄이 터졌어요

 

다음 순간에

 

사람들이 카메라를 들고
도망치는 거예요

 

빨리 뛰라고 난리였죠

 

저는 차에 끌려들어가

 

현장을 빠져나갔어요
무단으로 찍었던 거예요

 

허가 요청하면 안 해줄 걸
알았기 때문에

 

그냥 찍었던 거죠

 

무술 감독은 힘든 직업이에요

 

어떤 장면에서
여자애를 납치하려는 악당이

 

아이 머리채를 잡았고
차가 후진으로 달렸어요

 

우린 아이 부모에게 먼저 가서

 

부모의 허락을 구했는데

 

그냥 찍으라더군요

 

할리우드에서는 어림없어요

 

이 사람들은 매일 목숨을 걸고

 

멋진 장면을 만들어 내요

 

의사가 제 내장이
뒤죽박죽이라는 거예요

 

저는 내장이 뒤죽박죽인 게
무슨 소리냐고 물었죠

 

저는 치아가 정말로 빠졌어요

 

한 대 맞았는데
입 안에 치아가 돌아다녔죠

 

훙진바오는 치아 챙기고
계속 찍자더군요

 

원래는 도로가 아니라
차에 착지하는 거였습니다

 

3개월 입원하고 복귀했죠

 

홍콩 영화 촬영장에서

 

액션 감독이
몸에 불을 붙이고

 

계단으로 던질 거라고 하면
알아서 굴러야 해요

 

저는 고가 도로에서 떨어져서

 

달리는 트럭 위에 착지하고

 

그리고

 

달리는 밴으로 튕겨야 했어요

 

저는 고가 도로에서

 

예닐곱 밤을 매일

 

이 스턴트 장면을

 

사랑하려고 노력했어요

 

너무 위험하고 힘들었어요

 

감독은 한 번 더 찍자더군요

 

뭐가 이상해서요?

 

집에 가면 어머니가

 

보통 저에게 물어보세요

 

이 일을 계속 할 거냐고요

 

전 그렇다고 하죠

 

홍콩 영화 스턴트팀이 되려면

 

뭐든지 해야 해요

 

죽기 일보 직전까지 가는 일이
종종 있었죠

 

'칠복성'에서
그 라켓은 진짜였어요

 

소품이 아니었죠

 

스턴트 배우가 구석에서 이러는데

 

죽을까 봐 걱정됐어요

 

상처 하나 없군

 

즐거운 시간 보내자고

 

'예스 마담'에서

 

감독은 계속
더 세게 하라고 했고

 

상대는 아프니까
세게 하지 말라고 했어요

 

부인, 이제 된 것 같아요

 

미국에서 첫 영화를 찍는데

 

여긴 홍콩이 아니라며
살살 하라더군요

 

"미국"

 

미국에서 찍은 영화는

 

대부분 비디오로 직행했어요

 

이 세상에는...

 

거기 당신 안 보여

 

미녀가 혼자 가면
절대 안 될 곳이 있다

 

하지만 느낄 수 있지

 

하지만 그 미녀가...

 

차이나 오브라이언이라면 다르다

 

정말 상징적인 인물이었고

 

사람들은 저를

 

차이나라고 부르기 시작했어요

 

미국에서 '차이나 여걸'이
제작됐어요

 

중국 무술가야

 

영화는 관객을 사로잡으려고 했고

 

관객층이 분명히 있었지만

 

극장에서 경쟁하진 않았어요

 

전국에 널린 비디오점에서
관객들을 사로잡았죠

 

비디오 시대가 오면서

 

쿵푸 영화를 찾는 사람들이

 

어마어마하게 늘었어요

 

사람들 목이 찢어지고

 

손이 잘려요

 

사람들은 1년에
40편씩 영화가 나오길 원했어요

 

제가 어릴 때
비디오 열풍이 불었어요

 

집 바로 옆에
비디오점이 있었죠

 

하루 세 편씩 영화를 봤고

 

다 보면 다시 가서
더 빌렸어요

 

비디오점에서 사람들을 끄는 건
표지예요

 

'이퀄라이저 2000'을

 

코린 월과 찍었는데

 

표지에 코린은 거의 알몸이었고
저는 맨가슴이 나왔죠

 

하지만 그렇게 해야
비디오가 나갔어요

 

드디어 전 세계 최고
킥복싱 선수들이 출연하는

 

대작 액션 영화가 온다

 

한때는 발차기만 괜찮으면
영화에 출연시켰어요

 

장 클로드 반담, 돈 윌슨이 있었죠

 

돈 윌슨은
인간 병기나 다름없습니다

 

제 포스터는 전부
이렇게 돼 있었어요

 

'세계 킥복싱 챔피언
돈 더 드래곤 윌슨'

 

돈 윌슨은 역대 최고의
킥복싱 선수입니다

 

몸이 좋은 배우들에게
액션 연기를 시켰어요

 

연기는 별로 중요하지 않았죠

 

세계 가라테 챔피언
빌리 블랭크스

 

돈 윌슨이 저에게

 

'죽음의 혈투'에
출연해 달라고 했어요

 

돈 윌슨의 영화에 출연하다니
영광이라고 했죠

 

전 훌륭한 배우는 아니지만

 

하지만 목표는 제 무술 실력을

 

제대로 발휘해서

 

제 연기를 볼 필요도 없게
만드는 거였어요

 

전 흔히 말하는
비디오 스타가 됐어요

 

1년에 5편까지 찍었죠

 

극장에 걸리지 않고
비디오로 직행했어요

 

당시에 타임지에서 저와 돈 윌슨을

 

비디오 수익 최고 배우로 꼽았어요

 

저는 한 달간 전국을 돌면서

 

비디오점에서 대중을 만났어요

 

저는 비디오점에서
신시아 로스록을 만나서

 

정말 큰 팬이고
신시아를 따라서

 

영화을 찍고 싶다니까

 

촬영장에서 만나자고
사인해 줬어요

 

저처럼 이런 영화를 보고
꿈을 얻은 사람들이

 

정말 많았어요

 

이 사람들처럼 되는 게 목표였죠

 

비디오가 보급되면서

 

우리는 힘을 얻었습니다

 

어떻게 영화를 찍었는지 배우려고

 

결투 장면을
프레임 단위로 끊어 봤어요

 

느리게 재생, 빠르게 재생

 

정지, 되감기

 

느리게 재생

 

그래서 얼마 뒤엔
테이프가 다 늘어졌죠

 

'쾌찬차'를 예로 들자면

 

청룽 뒤에서 찍다가
장면이 바뀌는 게

 

이 지점이에요

 

개인이 처음으로 오락거리를
능동적으로 소비하는 거였죠

 

LA에서 무슨 일이 있길래
수천 명이

 

전국 최고 체육관으로
몰릴까요?

 

힌트를 드릴게요

 

제인 폰다는 당시 최고의
에어로빅 강사였습니다

 

제인이 가르치는 체육관이
우리 집과 3km쯤이어서

 

저는 직접 가서

 

창문으로 강의를 지켜봤어요

 

저는 태보를 알려드릴
빌리 블랭크스입니다

 

그리고 쿵푸 동작과

 

체조, 복싱 동작을
섞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태보라는 것을
만들겠다 결심했죠

 

전 세계 수백만 명과 함께

 

태보 혁명에 동참하세요

 

세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비디오가 됐어요

 

영화 '타이타닉'보다
많이 팔렸죠

 

1억 1,500만 개가 팔렸어요

 

어때요?

 

태보 골드는
40대 이상 남녀에게

 

필요한 운동으로
특별히 구성돼 있습니다

 

"홍콩"

 

상황은 유일무이하고
협정 역시 유일무이합니다

 

우리는 역사 의식과 더불어

 

자긍심과

 

미래를 향한 자신감을
가져야 합니다

 

90년대 중반은
홍콩에서 흥미로운 시기인데

 

중국 반환이 이뤄지기
때문입니다

 

홍콩 영화 기반 시설이
달라졌어요

 

중국 본토로 서서히 옮겨갔고

 

당시 홍콩 영화 산업은
모 아니면 도였죠

 

홍콩의 영화 제작 편수는
연 300편에 가까웠어요

 

인구가 900만 명도 안 되는
도시에서요

 

이해하기 어려운 수준의
과잉 제작이었죠

 

99년에 아시아 경제 위기가 닥치고

 

홍콩의 영화 제작 편수는 급감하여

 

연 50편에 못 미쳤어요

 

사방이 실업자였죠

 

당시는 과도기였고

 

액션 영화 제작자들은
어리둥절했어요

 

갈피를 잡지 못했죠

 

"할리우드"

 

그리고 미국으로

 

홍콩 배우와 감독들이
몰려들었어요

 

"할리우드"

 

홍콩 영화 산업에서
같이 성장한 사람들이

 

할리우드 영화 산업으로
넘어오기 시작했죠

 

경영진이나 에이전트들은
눈치 빠르게

 

상황을 파악하려 했어요

 

누군지 몰라도
확실히 시장에 매력은 있었죠

 

말하자면 우리는 어항 안에 있었고

 

모두가 우리를 보고
매력을 느꼈지만

 

왜 좋은지 뭘 할 수 있을지
모르고 있었죠

 

그때 위안허핑이 나타나서

 

판도를 바꿨습니다

 

쿵푸를 할 줄 알아요

 

보여 줘

 

워쇼스키 자매가
위안허핑을 찾아가서

 

액션 감독을 부탁했어요

 

위안허핑은 수락하면서
대신 3개월에서 6개월 간

 

배우를 훈련시키겠다고 했죠

 

문제는 어떻게 배우들을

 

실력을 타고난 사람들처럼

 

보이게 만들 것인가였어요

 

모두가 그 결투 장면에 매료됐어요

 

좋아하는 이유가 있었죠

 

홍콩식 액션을 원한다면

 

배우가 직접 해야 해요

 

'매트릭스'는
쿵푸를 멋져 보이게 했어요

 

최고의 90년대 영화였죠

 

홍콩 영화 정신이
깃들어 있었어요

 

홍콩 액션의 매력 중 하나가

 

결투 장면을 찍는 방식이에요

 

롱 테이크에
더 넓은 각도로 찍지만

 

와이어 작업까지 하죠

 

모두가 초인적인 힘을
가지고 있어요

 

'매트릭스'가 나온 뒤

 

와이어 작업을 할 줄 아는지
다들 궁금해했고

 

저는 6년, 7년 전에

 

이미 얘기했는데
당신들이 듣지 않았다고 했죠

 

덕분에 비주얼을 중요시하는

 

홍콩의 아이디어가

 

최첨단 기술과 영화에
잘 녹아들었죠

 

그때 미국에서

 

홍콩 영화가 멋진 것이 됐어요

 

쿵푸를 모르는 관객은
아무도 없어요

 

엄청난 대중 문화가 됐죠

 

위안허핑은 갑자기 거물이 됐어요

 

'와호장룡'에 참여했죠

 

이안 감독은 대만계 미국으로

 

어린 시절을
영화로 만들고 싶었어요

 

역사를 이용하되

 

완성도를 한껏 끌어올렸죠

 

'와호장룡'은 달라요

 

'대취협'으로 돌아갔지만

 

수준을 한껏 높였죠

 

이 영화가
국제 관객에게 통한 이유는

 

전에는 아무도 눈길을 안 준

 

숨겨진 비밀 전승을

 

사람들에게 보여 줬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서구 사회에

 

홍콩 영화에서 20년간 해온 것을

 

보여 줬습니다

 

량쯔충과 장쯔이의 결투 장면은

 

제가 가장 좋아하는
결투 장면이에요

 

경지에 이른 두 여성을 보는 건

 

정말 멋졌죠

 

정말 굳세고 강한 여성들이지만

 

기품과 우아함까지 갖췄어요

 

액션은 아름다웠어요

 

하지만 감정과 이야기가 중요해요

 

이 영화는 사랑에 관한 영화죠

 

- 액션, 판타지, 로맨스, 힘
- 남성미

 

전 세계 사람들에게 통했고

 

1억 달러 이상의 흥행 수익에

 

오스카 4개 부문 수상까지

 

대만, 홍콩

 

중국, 미국 사람이

 

이 작품으로 뭉쳤어요

 

덕분에 모든 나라가 무대가 됐고

 

갑자기 폭발적으로
시장이 증가하더니

 

홍콩, 중국과 경쟁하게 됐죠

 

"태국"

 

태국을 보면

 

판나 리티크라이 같은 사람들이
홍콩 영화를 보고

 

자신만의 버전으로
비디오를 제작하여

 

직접 배급했습니다

 

판나는 토니 자라는 학생을
발견했고

 

그들의 영화는 점점 발전해서

 

'옹박'을 만들어 냈고

 

태국 영화를
세계 무대에 올렸습니다

 

이 국가들은 전부

 

야만적인 갈등의 역사가 있었고

 

전부 다양한 영향을 받았죠

 

그리고 각각 뜯어보면

 

그 나라만의 무술 스타일이 있어요

 

'옹박'에서는 팔꿈치로
머리를 찍는데

 

새로운 스타일이었어요

 

'옹박 2'에서는 토니 자가

 

쿵푸를 하고

 

용 권법과 호랑이 권법을 쓰죠

 

모든 게 다 섞여 있어요

 

글로벌 시대잖아요

 

따라서 이건 영원히 끝나지 않는

 

재즈 공연과도 같아요

 

스턴트 배우가
소모품으로 취급될 때마다

 

새로운 액션 트렌드가
등장했습니다

 

인도네시아에서 '레이드'가 나왔죠

 

인도네시아에서 할 수 있었던 것은

 

싸고 빠르게 찍을 수 있었고

 

불안해 하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죠

 

재미있는 게

 

인도네시아 액션영화를 되살린 건
웨일스 사람이에요

 

그들은 모두 홍콩 영화를
보고 자랐고

 

홍콩 영화에서
영감을 받았죠

 

거기서 구성을 배우고

 

박자를 배웠죠

 

홍콩 액션 영화를
그대로 모방할 순 없어요

 

색다른 것이 필요했죠

 

모방하면 잘해봤자 2등이에요

 

'레이드'가 나왔어요

 

어떻게 또 한계를 넘었죠?

 

한계를 계속 넘으면서도

 

너무나 볼만하게
만들었다는 게

 

굉장히 멋져요

 

액션 영화 제작에

 

본능적인 길거리 감성이
남은 곳은

 

유튜브예요

 

첫 오디션도
결투 동영상 덕분이었고

 

첫 주연 영화도
결투 동영상 덕분이었어요

 

'에이미 대 다수'라는
영상을 만들었어요

 

정말 멋지고 강한 여전사를
만들고 싶었죠

 

합을 맞춘 무술, 카메라 워크와

 

배우들이 결합하면
마법이 펼쳐져요

 

'에이미 대 다수'를 보면서
정말 감탄했었죠

 

"액시던트 맨"

 

'액시던트 맨'에서
에이미 존스턴 말고는

 

솔직히 다른 배우를
생각 안 했어요

 

작은 금발 소녀가

 

그런 무술을 하는 건
신시아 로스록 이후 처음이었죠

 

유튜브는 정말 강력해요

 

서로의 기술을 활용할 수 있고

 

세상에 보여줄 수도 있죠

 

우리는 다른 방식으로
영화를 찍어요

 

옛날 촬영 방식은 끝났어요
전부 달라졌죠

 

디지털 기술 덕분에
완전히 새 영역이 됐어요

 

제가 어릴 때
유튜브가 없던 게 다행이에요

 

온갖 헛소리들을 올렸겠죠

 

제 경력은 한참 옛날에
끝났을 거예요

 

"애들레이드"

 

우린 애들레이드
빈민가에서 컸어요

 

3, 2, 1, 액션

 

우린 뒷마당에서 레슬링을 하고

 

서로를 두들겨 팼어요

 

가시 철사 같은 것도 썼죠

 

우린 뒷마당 쇼를
찍기 시작했고

 

그러다 영화를
제작하게 됐죠

 

우린 부모님이 못 놀게 하는
부류의 아이들이었어요

 

우린 페이스북에
영상을 올리기 시작했죠

 

그게 대박을 치면서
조회 수가 늘고

 

유튜브가 잘되면서
우리 직업이 됐죠

 

촬영할 때 파쿠르 전문가들과

 

무슬가들을 섭외했고
와이어 작업을 좋아해요

 

결투 장면이 있었는데
그때부터 뒤를 보기 시작했죠

 

'라카라카'의 결투 장면은
스타일이 전부 달라요

 

쇼 브라더스 영화를
많이 연구했고

 

카메라를 적극적으로 활용한 건
그게 처음이었습니다

 

결투 장소에 온 것처럼 느껴졌죠

 

쿵푸 음향 효과는

 

'라카라카'에 아주 잔뜩 쓰였어요

 

옛날 쿵푸 영화의 음향 효과를
'라카라카'에 썼죠

 

전 쿵푸 영화를 좋아했어요
고개 돌리는 소리까지요

 

서구 쪽 영화는 모든 게 안전한데

 

이 영화들은
너무나 날것 그대로고 미쳤어요

 

우린 호주 미디어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5위에 뽑혔어요

 

니콜 키드먼과 머독 사이에
위치하죠

 

페이스북과 유튜브에서
수십 억 편의 영상이

 

소비되고 감상됩니다

 

괜찮아?

 

미안해

 

왜 때렸어?

 

- 너도 종일 우리 때렸잖아
- 장대는 안 썼지!

 

이런 장르는 스토리텔링과
이어져 있어요

 

플랫폼은 바뀔 수 있지만

 

그 밑에 깔린 이야기는

 

매우 근본적입니다

 

언어 장벽이 사라져요
이해가 되니까요

 

전 세계에서 통용되는 이야기예요

 

시기를 잘 탔어요

 

모두 액션으로 하나가 됐죠

 

어디에서 시작된 건지
생각해 보면 멋져요

 

그런 영화들에 담긴 메시지는

 

아무것도 없는 사람들에게
닿고 있어요

 

결혼반지를 산 날
여자친구에게 차였어요

 

그래서 이스트빌리지의
어느 술집에 갔고

 

기분 전환 삼아서
우간다 최초의 액션 영화인

 

'누가 알렉스 대위를 죽였나'
예고편을 보고 있었어요

 

90초짜리였죠

 

확실히 저예산이었지만

 

서구에서는 돈이 없으면
사랑 이야기를 만들어요

 

전쟁 영화를 만들지 않죠

 

너무 기발했고
조회 수가 수백만이었어요

 

잊을 수가 없었어요

 

최저가 표를 샀고

 

공항을 경유하니
28시간이나 걸리더군요

 

"우간다"

 

우린 오토바이 뒷자리를 타고
하수도 앞에 있는 작은 집에

 

도착했어요

 

와칼리우드 설립자인

 

아이작 나브와나가 있었고
저는 제 소개를 했습니다

 

뉴욕에서 왔고
얘기를 하고 싶다고요

 

아이작은 가벼운 인사가 다였어요

 

함께해요

 

2주 뒤 저는
우간다 액션 영화 스타가 됐어요

 

가자

 

미국에 있는 부인은 잊어

 

그 여자는 널 미워해

 

거긴 똥물이야
여긴 우간다라고

 

사방이 똥밭이지

 

심각하게 아팠어요

 

계속 설사하고

 

계속 토해서
다들 무서워했어요

 

백인이 죽으면
곤란하다는 표정이었죠

 

저는 인시마 족에
입양됐어요

 

이제 제 이름은

 

앨런 살리 오위언치마우
사와카그바카

 

아네메 파니우수간달랍톱

 

호프마니스일 거예요

 

1981년에서 1982년 즈음에

 

세대가 바뀌어 처음으로

 

나라가 개방됐어요

 

외부 영향과 문화를 받아들였어요

 

힙합과 영화가 들어왔죠

 

그러나 내전이 터졌고

 

학교는 폐교한 거나
마찬가지였어요

 

공부는 어떻게 하며
14살인데 우간다 상황을

 

어떻게 인식하겠어요?

 

그 시작은 영화였어요

 

이 제멋대로 뻗어가는 빈민가에서

 

우간다에서 가장 유명한
액션 영화 감독인

 

아이작 나브와나가
영화를 찍습니다

 

저는 중국 쿵푸를 정말 좋아했고

 

쿵푸 영화를 만들고 싶었어요

 

우린 중국 쿵푸를

 

우간다 쿵푸로 바꾸고 싶었어요

 

세상에 아프리카 쿵푸가 뭔지

 

보여주고 싶어요

 

제 영화에 쿵푸를 더 넣어야겠어요

 

이곳 관객들이
쿵푸를 좋아하거든요

 

아이작은 진짜 말도 안 되게
홍콩과

 

코만도를

 

우간다식으로 섞었어요

 

브루스 유라는

 

우간다 브루스 리도 있죠

 

브루스 리와 중국 영화에게 작별을

 

저는 쿵푸를 좋아합니다

 

아이작은 세계적인 천재 같아요
진짜 이야기꾼이거든요

 

아이작은 폭력을 봐 왔고

 

충분히 안다고 했어요
진짜 폭력은

 

군인이 마을로 와서

 

아버지를 가리키고
창고 뒤에서 총성 두 번이 울린 뒤

 

아버지를 영영
못 만나는 거라고 했죠

 

그게 폭력입니다

 

난 폭력을 쓰는 게 아니라
인생의 교훈을 주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배우들을 모았고

 

우리 아이들을 데리고
납치범이 있는 곳에서

 

쿵푸 영화를 찍자고 했어요

 

납치범은 정말 두렵지만
맞서 싸울 수 있으니까요

 

아이들은 강하게 훈련했으니
진짜 납치범이 있다면

 

납치 생각을 접을 겁니다

 

'무서운 세상은 바로 우리'라는
어린이 쿵푸 영화를 찍었는데

 

아이들에게 액션 주인공을 맡겼고

 

앞으로의 생존에
도움이 되면 좋겠어요

 

아이들이 대의를 위한다는
느낌이 드는데

 

제가 처음 우간다로 올 때
바로 그 심정이었습니다

 

제가 확신하건대

 

인도 북부의 아이가

 

아프리카 어느 마을에서 만든
이 영화를 보는 순간

 

영화가 만들어진 환경을
알아차릴 거예요

 

그리고 20년 뒤에
그 아이는 유명해지겠죠

 

"데이비드 캐러딘의
쿵푸"

 

저는 배우로서

 

스트레스를 잘 압니다

 

스트레스를 반드시 해소해야

 

자유롭게 연기할 수 있죠

 

여기 계신 분들과 함께

 

고대 쿵푸의 기술을 비롯해

 

쿵푸의 엄청난 힘을
보여드리겠습니다

 

머리를 시계 방향으로 돌립니다

 

엉덩이를 시계 방향으로 돌립니다

 

머리는 고정하세요

 

몸에 힘을 뺍니다

 

손바닥을 위로 하고

 

학의 부리를 만듭니다

 

손목을 뒤로 젖히고
팔꿈치를 접었다가

 

다시 뻗습니다

 

무릎을 밖으로 열고

 

발가락을 앞으로 하고

 

허리를 세우고
그대로 앉습니다

 

엉덩이를 앞으로 당깁니다

 

쿵푸를 대하는 마음가짐은

 

연애와 비슷합니다

 

알아가면서

 

서서히

 

쿵푸를 향한 진정한 사랑을
쌓는 거죠

 

자 막 : 이 한 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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